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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un 30. 2022

운수 나쁜 날

아침 일기 6

장마가 시작이 되었다고는 하나 동해안 쪽으로는 비가 올 기미조차 없고, 정수리 위 뙤약볕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바닷길 산책로의 아스팔트 위로 올라오는 열기도 만만치 않아 금세 온몸이 후줄근해진다. 이런 백낮에 대놓고 걸으려고 한 게 잘못된 생각이었나?


멀리 보이는 해안로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다. 사실, 바닷길을 걸을 때는 사람 보는 재미도 만만찮은데, 푹푹 찌는 무더위 아래를 무턱대고 걷자니 짜증이 지대로다. 갑자기 신봉선 생각이 나는 게, 이건 또 뭔 일이람.


실없이 웃으며 바다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걷는데, 요란한 기계음이 들려 앞을 바라보니, 30킬로 속도 제한이 있는 해안도로 위를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함께 오픈카 한대가 휑하니 속도를 올리며 지나쳐간다. 차 뒤꽁무니 쪽에 박힌 엠블럼이 눈에 익은데, 저게 뭐더라.


마세라티인지, 람보르기니인지 헷갈리긴 해도 여름철만 되면 이 빈한(貧寒)한 바닷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차종이긴 데, 이 또한 짜증 지대로다. 잠시, 쪽빛 바다에 넋이 팔려 차분하게 가라앉던 마음이, 저 무도한 놈 따위에 크게 흔들리다니. 갑자기 시원한 막걸리가 생각이 나면서, 유럽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을 이 선생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선생은 코로나 제약이 머지않아 풀릴 것을 예상하고, 지난 3월에 유럽 네 나라를 돌아보는 패키지여행을 예약해 두었다고 한다. 올 2월 정년을 하자마자, 부부가 함께 운동을 하거나 남도 여행을 떠나는 등, 미리 생각해 둔 인생 2막의 버킷 리스트를 목록에서 하나하나 지워가며 실행하는 과단성(果斷性)이 늘 부러운 친구였다. 아마 지금쯤은, 날마다 하는 부부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으리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으므로, 이 선생과 약속을 잡은 곳은 동네 재래 상가 안의 대폿집이었다. 며칠 전에 이곳에서 마셨던 막걸리와 안주거리가 인상에 남아, 언제가 다시 들리기를 작정해 둔 곳인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된 것이다.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이 선생에게, 같은 단지에 살고 있는 정 선생을 부르는  어떻겠냐고 슬쩍 운을 띄웠다. 정 선생은 고등학교에서 우리와 함께 근무하다가 큰 놈이 동일한 학교로 입학하는 바람에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어쩔 수없이 같은 재단의 중학교로 적(籍)을 옮겼다. 오래전, 이곳으로 이사 자리를 함께 한 이후로는 동네에서 따로 만난 적이 없었고, 이제 우리 두 사람이 퇴직까지 한 마당이기에 모처럼 위로라도 줄 겸 자리를 같이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5시쯤 되어 정 선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멸치와 미주구리를 섞은 무침회를 안주로 이미 우리 두 사람은 막걸리 한 병을 후딱 비우고 난 후였다. 그런데 서로가 무심했던 것이, 정 선생이 자리에 앉으며 하는 말이 학교 앞 아파트로 이사를 간 지가 이미 1년도 넘었단다. 여태껏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무안하면서도, 결국  먼 곳까지 일부러 발걸음을 하도록 한 것이 무척 마음 쓰였다.


선생 셋이 모이니, 화제가 자연스럽게 학교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코로나 이전부터도 동료 교사 사이의 모임이 뜸했던 것 같다. 교직생활 초창기만 하더라도 선생님들끼리 모이는 술자리가 잦았었는데, 퇴직할 무렵에는, 소위 말하는 회식 아니면 선생님들끼리 함께 모이는 자리가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사실,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얼굴이라도 맞대어마음 고충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할 수 있는 법인데,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없으니 예전만큼 선생님들 사이에서 정() 없어진 것 같다. 혼자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함께 고민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시절은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금 선생이 교사로서 홀로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더욱 안타까운 것은, 퇴직한 선배 교사의 입장에서 그저 한 두 마디 말로밖에 위로 없는 자괴감(自愧感)때문이다.


다시 만나자고, 언제 지켜질는지도 모를 약속을 하고 헤어진 것은 밤 아홉 시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막내에게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 갈 거라고 진작부터 약속을 해 두었으니,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술김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무인점포에서 여러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골라 담은 후에, 세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했는데, 평상시와는 달리 종이 캐리어에  담아서 건네는 것이 얼핏 마음에 거슬렸다.


아이스크림 봉지와 데이크 아웃한 커피를 양손에 나눠 들고 엘리베이터의 오름 버튼을 누르다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커피를 든 손으로 버튼을 누르려는데 캐리어의 종이가 찢기더니 커피가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급히 손을 추슬렀는데도 한 잔은 뚜껑까지 열린 채 완전히 쏟아지고, 한잔은 반쯤, 나머지 한 잔만 그대로였다. 우선 바닥을 뒹구는 얼음부터 발로 한쪽으로 쓸어내고 캐리어 속 커피를 챙기는데 마침 위층에서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 이르러 문이 활짝 열렸다. 타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밤에 악몽을 꾸었다. 속이 쓰라린 것이, 잠시 잠에서 깨면 입 속으로 막걸리 냄새가 온통 진동을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질척하게 말라 있을 커피 자국도 밤새 마음에 거슬렸다. 잔소리를 듣건 말건, 흘린 커피를 바로 닦으러 내려가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이른 새벽부터 집 밖을 나설까 하다 이건 또 아닌 것 같아,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결에 뒤척이다 보니 벌써 아침 여덟 시가 지나고 있었다.


10여 분간 다시 고민을 했다. 하필이면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한창 붐빌 출근과 등교시간인 것이다. 물휴지를 여러 장 구겨 반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문밖으로 나가 보니, 22층에 멈춰 섰던 엘리베이터가 막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내림 버튼을 누르고 난 후 잠시 지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데, 마침 낯익은 초등학생이 타고 있었다.


모른 척, 아이내려서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얼른 주머니 속의 물휴지를 꺼내 커피 자국이 여전히 질펀한 바닥 위로 던졌다. 물휴지를 신발로 꾹꾹 눌러가며 이리저리 는데, 물기가 아직 바닥에 남아있어서인지 그나마 커피 자국이 쉽게 지워졌다. 지난 새 잠 못 이루던 부끄러움이 슬며시 함께 지워지는 것 같아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내친김에 커피숍에 들러 세 잔의 커피를 테이크 아웃했다. 다행스럽게도, 전날 저녁의 아르바이트생이 아니어서 밤을 사이에 두고 잇달아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는 이유가 궁금할 리 없으니, 안물 안궁, 그저 나 혼자 계면쩍을 뿐이다.


사실 어제는, 막내의 부탁으로 심부름하긴 했어도 시원한 커피로 쓰린 속을 달래고 싶은 마음이 무척 컸었는데, 그만 커피를 엎지르고 말았다. 운수 없는 날...


어제 일을 생각만 해도 피식 웃음이 났지만, 아침에라도 커피 자국을 말끔히 지우고 나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래서인지, 쓰린 속이 덩달아 풀어지면서, 오늘 점심땐 돼지국밥으로 해장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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