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멋대로 <번역가의 OO 시리즈>의 첫 번째 주제는 '책'이다.
번역가의 OO 시리즈지만 이는 '나'라는 번역가 한 명에 매우 국한된 이야기임을 앞서 밑밥으로 쭉 깔아 둔다.
번역가와 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미지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번역'하면 떠올리는 건 책 아니면 영화니까. 사람들은 그 외의 번역은 잘 모른다. 나 역시도 번역가가 되기 전까진 그랬다.
하지만 번역 시장에서 출판 번역과 영화 번역은 극히 일부의 파이만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파이는 게임 번역이나 상품 번역, 비즈니스 번역 등 통칭 '산업 번역'이 점령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게임 번역을 위주로 하고 있는 산업 번역가이자, 13권의 역서를 펴낸 출판 번역가이기도 하다. 사실 10권이 넘어서기 전까지는 출판 번역가라고 어디 가서 말하기 머쓱했는데, 10권이 넘어간 이후부터는 출판번역가라고 해도 될 거 같더라고.
어쨌든. 출판 번역가가 번역가의 전형이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번역된 책에 '옮긴이'의 이름이 모두 적혀있기 때문이다. 산업 번역이나 게임 번역은 번역가의 이름이 적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책이나 영화에는 옮긴이의 이름이 대부분이 명시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번역가'하면 '옮긴이'라는 글자를 제일 많이 본 '책'을 떠올리게 되는 것... 이 아닐까 나 혼자 추측해 본다.
그러니 번역가는, 책을 만드는 한 프로세스를 담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을 거란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마 거의 맞지 않을까 싶다. 번역가라는 직업은 활자 읽기를 싫어하면 결코 할 수 없는 직업이니까. 책 읽기와 외국어를 좋아해서 번역가가 된 분들도 꽤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책이라는 물건을 사랑하고, 그것을 외국어에서 우리말로 옮기는 데 자긍심을 갖는 분들도 꽤 있다. 그러니 책을 많이 읽는 번역가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결 때문에 번역가는 지적인 이미지도 꽤 있는 거 같다.
그러니까, 번역가들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지적인 분들도 많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문제는... 나는 그런 번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나는 내 책들에서 독서량이 적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반성이자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다짐이기에 책에 새겨 넣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책을 별로 안 읽는다는 글을 쓴 뒤로 책을 더 많이 읽어보려고 노력을 꽤 많이 했다. 실제로 전보다는 많이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면 자연스럽게 책으로 손이 가는' 레벨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전공인 '읽다 포기하기'를 고치지도 못했다. 초반 몇 챕터만 읽다가 '나중에 마저 읽어야지~'하고는 영영 안 읽는다거나, 재미있어 보이는 혹은 유용해 보이는 챕터만 읽고는 '나중에 마저 읽어야지~'하고 세이굿바이를 하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리고 나는 누가 추천해 주는 책을 사서 읽는 편이며 최근에는 스스로 책을 골라서 읽은 적이 별로 없다. 다급히 덧붙이는 말인데,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학생 때나 중학생, 고등학생 때는 절대로 이러지 않았다는 거다. 학교 도서관을 아주 애용하는 조용한 독서소녀였다고! 내가 그때 <료마가 간다>와 <대망> 같은 걸 읽지 않았다면 <한 달의 교토>는 다른 결의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읽은 책들로 지금도 먹고살고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여기서 내 나름대로의 변명을 해보겠다. 사실 나는 활자를 아주 많이 읽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아기를 등원시키고 일감이 있을 때는 온종일 번역을 하니, 아마 남들보다는 활자를 많이 읽는 편일 것이다. 평균 6시간 정도 업무를 하는데, 6시간 내내 일본어를 곱씹고 생각하며 한국어로 옮겨댄다. 그러니 쉬는 시간에 '머리 좀 식히자'하면서 책을 집어드는 건 좀... 아니, 실제로 머리를 식힐 겸 소설책을 읽는 역자님이 계실지도 모르니 쉽사리 말하기 뭐 하지만, 일단 내 입장에서는 눈도 머리도 손가락도 쉴 시간을 주고 싶다고 주장해 본다. 인스타그램 피드나 넘기면서 이번주말에 나들이하기 좋은 곳이나 살펴보고 맛집을 보면서 쉬는 것이다. 그러다가 간식 좀 먹고 다시 작업에 임한다. 이 사이클을 2,3번 반복하고 그날의 업무를 끝내면 다시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는........ 이래서 내가 책을 못 읽는 거구나. 역시 만악의 근원 SNS가 문제였다.
사실 나의 변명이 무색하게도, 출판 업계 사람들과 번역가 분들은 책을 아주 많이 읽으신다. 나의 논리라면 그분들은 눈이 피곤해서 책을 전혀 읽지 않으시겠지. 나도 안다. 그러니 반성하고 SNS를 줄이고, 책 읽기를 조금 더 활발히 하는 것이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 우아하고 지적인 번역가 되기를 위해서도 좋을 거 같다. 일단 집에 사놓고 안 읽은 책들부터 좀 읽어보려고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책 많이 읽을 테니 혹시 일본어 번역이 필요하신 출판사가 계시다면 꼭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성심성의껏 열심히 번역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