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10년 만에 만나는 옛 친구를 만났다. 중학교 때 친구 B였다. 원래 중학교 친구 A와 함께 셋이서 만나곤 했는데, 그냥 어쩌다 보니 B와 연락이 끊겨 최근 10년 동안은 A와 나만 만나곤 했다. 그러다가 재작년 내 결혼식 때 B가 참석한 것을 계기로 다시 연락하게 되었고, 연말 송년회 때는 드디어 오랜만에 A와 B, 그리고 나까지 셋이 함께 모일 수 있게 되었다.
3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이 애매한 나이를 앞두고, 우리는 각자의 근황을 나누었다. 근황 하면 일단 일 얘기다. 각자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차례가 와서 나도 근황을 이야기했는데, 어쩐지 그때의 기억이 새해가 된 지 2주가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나는 그냥... 번역하고 책 쓰고 그러고 살아..."
그때 당시, 정말 내 입으로 딱 저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황급히 입을 손으로 가리며
"헉,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있어 보이잖아?!"
라고 내 입으로 덧붙여 말하곤 엄청 쑥스러워했다. 쑥스럽긴 했다. 하지만 '번역하고 책 쓰고 살아'라는 말에 거짓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내 주 수입은 일본어 산업 번역+출판 번역 수입이었고, 2권의 책을 써서 팔아 정기적으로 인세 수입도 얻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쑥스러워했을까?
생각해보면 '번역하고 책 쓰고 그러고 삽니다'라는 말이, 언젠가의 내게는 굉장히 멋있고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쑥스러웠는지도 모른다. 10대 후반~ 20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나는 지금의 삶을 꿈꿨다. 번역이라든가 작가 같은 구체적인 단어를 떠올린 것이 아니다.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햇살이 듬뿍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에서 커튼을 살짝 치고 커다란 모니터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모습을 떠올렸다. 책상 위에는 책과 원고들이 가득하고, 방 벽면에도 책들이 잔뜩 꽂혀있는 모습이다. 이 풍경의 구체적인 모티브가 된 것은 예대에 다녔던 시절에 종종 방문한 교수님의 방이었던 거 같다. 사실 교수님의 방은 정리정돈이 되어있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책과 서류의 혼란의 도가니였다. 수많은 서류들과 책들, 액자들 속에 책상이 묻혀있는 그런 방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방이 어쩐지 너무 신기하고 멋있었다. 진정한 학자의 방 같았다. 학생인 우리들이 교수님의 방에 방문할 때마다 교수님은 웃으며 맞이해 주셨는데, 교수님과 앉아 1:1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어쩐지 내게는 너무 우아하게 느껴졌다. 물론 학교를 졸업한 지 한참 되었으니 이 기억 자체가 미화된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교수님의 방을 모티브로 한 그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10년 넘게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햇살이 듬뿍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방은 아니지만(작업방 창문이 크긴 하다), 어쨌든 내가 직접 고른 책들이 꽂혀있는 방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차와 함께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삶을 살게 되었다. 사실 그 이미지 속에서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쓰는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 다만 가끔, 그 이미지를 떠올릴 때 '그런 방에서는 번역을 하거나 작가로서 글을 쓰면 멋있을 거 같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멋진 방을 얻을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인지 떠올렸고, 어린 날의 나는 정말 생뚱맞게도 작가, 번역가, 교수를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교수 빼고는 그 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직업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머릿속 이미지와 가까운 삶을 조금씩 쟁취해나가다 보니 나는 번역가 겸 작가가 되었다. 그 사실이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엄청나게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든가 유명한 번역가는 아니지만 먹고살만한 수입을 얻으면서 이 일을 지속해나가고 있고 이름이 박힌 책도 꾸준히 내고 있다. 그리고 머릿속에 그 방을 아직도 떠올리며 '그 방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사실 이제는 어느 정도 답을 안다. 단적으로 말해서, 커다란 창문이 있는 남향의 오피스텔이나 작업실 구해서 책을 꽂고 책상을 놓고 일하면 아마 그 방을 실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빠진 점이 있으니, 내 머릿속 그 방의 조건은 '누군가가 제공해준 방'이며, 나는 그 방과 집 사이를 '자가용'으로 스스로 운전해서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점이다. 까다롭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교수를 떠올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가 비정기적으로 손님으로 찾아오기까지 해야 한다. -_-;;
그렇다면 교수가 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수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작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도 한 달도 안되어서 때려치웠으니 이제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할 자격이 내게는 없을지도 모른다. 흑흑.
솔직히 2/3 정도는 그 이미지를 이룬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10년 넘게 막연하게 머릿속에 간직해온 이미지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과연 나는 그 이미지를 실현해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때의 나는 모니터로 어떤 글을 쓰고 있을지,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다. 때로는 '이제 나는 끝인 거 아닌가,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그건 내 나이에 비해 너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30대 초인 지금은 20대 때보다 체력도 많이 줄어들었고, 그때만큼 에너제틱하게 일하진 않아서 '이대로 늙어가는 건가'라는 생각도 간간이 든다. 하지만 20대 때 운동을 하지 않다가 50대 때 등산이 취미가 되어 설악산과 지리산을 턱턱 올라가는 아주머니들을 떠올리며 희망을 가진다.
모쪼록 올해는 조금 더 잘 나가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그 방의 이미지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마음 편하고 기쁜 일이 종종 생기는 해가 되기를.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찾아오는 해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