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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나이 Aug 12. 2022

바닥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퀴블러 로스의 5단계 :부모 이야기



둘째의 출산과 큰 아이의 재활치료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아이의 유치원 휴원 세 가지 일을 한 번에 맞닿드렸다. 육아휴직과 동시에 시작된 코로나는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를 마쳐도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더니 다시 회사를 복직하고 2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 곁을 잔류하고 있다. 처음 코로나가 퍼져나갈 때 걸리면 지역사회에서 매장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폐가 손상되어 다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많은 사람들이 걸렸다 낫고 나서야 코로나는 감기처럼 또는 풍토병처럼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그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말을 하기 전에는 몽이가 말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았고, 말이 트이고 나니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뭐든 시간이 지나고 겪어보고 나서야 상상의 괴물인지 뾰로롱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있나 보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5단계라고 알려진 장애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리적응 과정은


1단계 : 충격과 부인
2단계 : 분노/원망
3단계 : 운명 타협
4단계 : 좌절/낙담
5단계 : 수용


이렇게 나누어진다. 어쩌면 수용으로 가는 4가지 단계는 내가 만든 상상 속 세상과 현실을 타협해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도 말 트이면 금방 쑥쑥 정상 발달을 쫓아갈 것 만 같았다. 진단을 듣고 세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오진일 거라 생각했고, 육아 초보 워킹맘인 내가 한심에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 육아보다 일이 먼저인 남편이 이 상황을 만든 건 아닌가 원망스러웠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학령기 전에 집중치료를 해야 좋아진다는 말에 언어, 인지, ABA, 감각통합... 많은 치료실을 다녔다. 어쩌면 '완치'가 될 수 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나를 밀어 붙였다.

그러다 마음이 바닥까지 닿았다. 어떤 노력을 해도 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마음은 지하 바닥까지 내려가버렸다.


무엇이 날 바닥으로 끌어내렸을까.

아이는 남들처럼 자랄 수 없다는데.. 그럼 어떻게 자란다는 거지?  

'장애'라는 건 내가 평생 옆에서 보모가 돼 주어야 하는 건가?

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가르쳐야 하나?

내 삶이나 커리어는 포기해야 하나?

남편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지?

남들과 다르다는 걸 느끼는 아이는 얼마나 힘든 거지?

뱃속에 있는 둘째도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끝없이 내 안의 질문을 반복하다 다음 날 아침에 오지 않길 바라며 잠이 들었다. 나에겐 그때가 마음의 바닥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수십 권의 책을 읽었고, 책들은 말해주었다.


"바닥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다"


왜냐면 바닥에 닿는 순간 다시 올라오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바닥의 차가움은 나를 잠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막연한 생각들은 '상상 속의 괴물'이었다. 바뀌는 건 없었다. 장애가 있어도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이고, 나와 내 주변은 그대로 있기에. 그리고 지금 너무도 행복하다. 아픈 아이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며 남편은 세상에 더없이 좋은 아빠가 되었고, 둘째는 형아를 너무나 좋아하는 꼬맹이고,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사랑해준다. 눈앞에 놓인 수많은 미션들을 클리어하며 아이를 통해 우리 가족은 성장하고 있다.


인간은 현상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불안해진다.
-에픽 테스토-



좌절/낙담의 단계는 상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괴리를 직접 피부로 느껴야만 별거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 같다. 어쩌면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이자 수용의 단계로 들어서는 관문이기도 하다. 고난의 끝을 경험한 에픽 테스토의 말처럼 우리는 현상(장애아이)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막연한 생각 때문에 불안해지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며 앞의 단계를 겪어 내고 있는 많은 부모님들께 "우리 아이들도 사랑스럽고, 우리 가족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바닥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아요. 금방 다시 올라올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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