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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Mar 20. 2021

트랙을 도는 경주마

여보, 딴짓 좀 하겠소_8

 

 최고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을 넘어서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한다는 의미입니다. 
 주변 모든 사람이 할 수 없다고 말할 때도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내리막이라고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나는 다시 정상에 섰고, 거기서 내려오느냐는 
 자발적인 선택과 결단의 문제일 뿐입니다.
 
 - 나디아 코마네치의《미래의 금메달리스트에게》중에서 –


삶의 기쁨을 발견해가고 있는 이에게


당신이 삼국지라는 소설을 전부 읽어 봤는지 궁금하네. 삼국지에는 많은 영웅호걸들이 등장하지. 우리가 많이 아는 유비, 관우, 장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반대편에는 조조와 원술을 비롯한 주군들과 제갈량과 방통을 포함한 지혜로운 책사들의 활동이 흥미롭게 소설 전체를 채우고 있지. 유비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에 동탁이라는 인물 밑에서 행동대장 역할을 하는 여포라는 인물이 있었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여포 정도가 되어야 관우나 장비와 한판 겨룰 수 있는 정도야. 그 무예가 출중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여포를 받쳐 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붉은색으로 토끼처럼 잘 달린다고 하는 적토마가 있었기 때문이야. 이 말로 인해 여포의 무예는 더욱 상승되어 많은 장수들의 부러움을 샀을 정도니까. 다른 말보다도 모든 장수들이 탐내었기에 그 말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무척 많았지. 만약에 장비나 관우가 여포의 적토마를 탔다고 하면 삼국지 소설 전체가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곤 해. 갑자기 웬 말 이야기를 하냐고? 삼국지에서 많은 영웅들을 태우고 다닌 적토마 같은 말들이 왠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중년 남자들의 처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우리들이 열심히 장수를 태우고 목적지까지 달리는 말과 같은 처지가 아닌가 해서 말이야.


우리 남자들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회사에서 만나는 상사 또는 회사의 적토마가 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려온 것 같아. 여포의 적토마의 능력보다 더 좋은 체력과 열심을 가지고 우리는 상사들을 모셔오고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아마도 우리는 사회라는 곳, 직장이라는 곳에 발을 내딛게 되면서 그곳이 우리가 뛰어야 할 경기장이고 거기가 열심히 달리는 것이 우리의 최선인 줄 알고 살아왔던 거지. 우리가 달리고 있는 회사라는 경기장, 트랙에는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도 모르는 그 함성 속에서 우리는 달리고 또 달렸던 거야. 10년 이상을 달리다 보니 우리가 달리는 곳은 동일한 프레임이 반복되는 경마장의 트랙 같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아마도 나뿐만 아니라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살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그 트랙은 내가 선택한 것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경기장일 수도 있지. 거기서 우리 앞에 보이는 당근을 먹기 위해서 정말로 아무 생각하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던 것 같아. 그것을 우리는 ‘월급’, ‘Pay’라고 부르고 있지만 말이야.




여보, 지난 직장생활을 돌아보면 엄청 긴 것 같지만 매우 단순하게 요약되는 것 같아. 우리가 달리고 있는 트랙에서는 많은 이들이 달리고 있었지만 내 주변에는 누가 함께 달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었어. 그것은 경마장에 달리는 경주마처럼 눈가리개가 있어서 오직 앞만 보고 달리게 되어 있었지. 주위 풍광을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앞에 있는 홍당무를 먹기 위해 오직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열심히 달리면 홍당무는 먹을 만큼만 주어졌고 거기에 우리는 만족해하며 길들여져 가고 있던 거야. 아니 오히려 안주할 때도 있었지. 어떻게 보면 앞만 보고 달리는 트랙 위의 경주마는 다름 아닌 우리 40대 중년들이었지. 중년 남자들은 오직 살기 위해 그리고 앞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먹이를 향해서 달리고 또 달렸어 그래서 적당히 당근도 먹을 수 있었고 잘 달리는 경주마로 칭찬을 받기도 했지. 어떻게 보면 경주마로써 아무 불만 없이 역할에 충실하게 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는 다른 동기들보다 더 잘 달리고 능력을 발휘하는 상사의 적토마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살았는지도 모르지. 주인이 능력을 인정해주는 것에 목말라하면서 늘 같은 트랙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때가 많았어. 눈에 비치는 것은 앞에 달려가고 있는 경주마들만 보였고 주변이 늘 반복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지. 그리고 달리는 것이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거야. 가끔씩 주는 당근도 풍족하게 주는 것이 아니라 먹고 달리는 것만큼 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거야.



우리 자신이 앞에서 언급한 트랙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경주마였던 것이지. 그것도 매일 똑같은 코스를 달리고 있었고 끝날 것 같지도 않은 무한히 반복되는 경기였어.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야는 앞만 보게 가려져 있다는 거였어. 어떤 이유에서든 잠시 멈추어 서서 보니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어. 먼저 우리 눈을 가리고 있는 눈가리개를 벗어던져야 함을 알았어. 그러자 앞만 보이는 시야가 주위 사방이 환하게 다 보이는 거야. 거기에는 우리를 응원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고 나의 친구들로 내 주위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지. 달리던 곳에서 벗어나 보니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같은 트랙을 달리는 무리 중에 하나가 바로 나였던 것을 알게 되었어.


잠시 그 트랙 위에서 벗어나니, 주위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 같은 트랙에서 같은 장면밖에 볼 수 없지만 눈가리개를 떼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니 많은 것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때로는 펜스 너머에는 자유롭게 달리는 야생마들도 보이더라고. 가끔씩 말이야. 그들의 모습은 정말로 여유로웠고 우리처럼 매일 달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어. 그들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만 해오던 그런 모습이었던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도 저렇게 자유롭게 달리는 야생마의 기질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 단지 우리가 야생마이기를 포기하고 경주마로 살기 위해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던 거야. 당근이라는 먹이를 먹기 위해 야생마의 기질을 포기하고 잘 훈련되고 같은 트랙 위만을 달리는 경주마로 착실하게 살아온 나를 포함한 많은 중년들의 모습이 보였어.




여보, 40대에는 다시금 내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본성인 ‘야생마’의 기질을 불러내 올 때라고 생각해. 더 이상 늦으면 그 야성이 깨어나는 시기를 놓칠 것 같아. 야생마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넓은 들판과 산야를 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먹이를 스스로 찾아 강을 건너기도 하는 것이 야생마이지. 우리 안에서 잠자고 있는 그런 본성을 꺼내어 다시금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도 여포의 적토마처럼 멋지게 달려야 한다고 생각해. 우리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본성이 프로그래밍되어 있지 않을까? 이제는 우리 등위에 얹혀있는 안장을 벗어버리고 우리 입에 물려있는 재갈도 스스로 풀어낼 때가 된 것 같아. 그리고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은 감추어진 질주의 욕망을 불러낼 때가 되었지.  40대까지의 삶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잘 훈련되고 말 잘 듣는 경주마의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하면 이제는 잠자고 있는 야생마의 기질을 불러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더 늦기 전에 말이야.


내가 생각하는 경주마란 오직 속도를 내고 길들여진 대로 잘 달리는 것이라 생각해.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예전 같은 속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경주마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고 외면당하기 쉽지. 언제든지 전성기 때처럼 최고 스피드를 계속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거야. 이제는 스피드로 무기로 사는 경주마보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달리고 싶을 때는 가슴이 터지도록 달리고 때로는 넓은 들판을 보고 한적하게 거닐기도 하는 야생마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더 이상 속도로 승부하는 경주마의 삶은 의미가 없어지는 거지. 야생마는 속도로 승부하지 않고 달리고 싶을 때만 달리지. 그것은 오로지 나 자신, 우리 중년 남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지. 경주마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익숙하면 평생 죽을 때까지 남이 주는 먹이에 따라 살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야생마처럼 살게 되면 그 과정은 힘들더라도 자연에 적응하면서 우리 안에 본성을 드러내어 멋지게 들판을 달리는 야생마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 그것이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이지. 한때 경주마의 삶을 살았다고 하면 이제는 야생마로서 살아보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적토마처럼 영웅호걸을 태우고 다닐 수도 있지만 그냥 자연에서 달리고 싶을 때 달리는 그런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는 야생마처럼 살기를 바랄 뿐이지. 아직도 트랙 위에서 그 환경이 최적인 줄 알고 달리고 있는 이 시대의 마흔의 중년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경주마로 살지 말고 야생마처럼 살자고 말이야. 갑자기 야생마처럼 살자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닐 거야. 경주마로 살려면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는 것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해.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지. 내가 추구하는 것, 승진, 인정, 더 많은 급여 등을 하나씩 내려놓기만 하면 그만큼 자유가 내 삶에 스며들기 시작할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에 여유가 들어오기 시작하지. 하지만 이것이 참 어렵다는 거야. 머리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쉽지 않다는 거지. 이제는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을 의지적으로 하나씩 힘을 풀어주어야 해. 머리에서는 힘을 풀지 않고 꼭 쥐라고 이야기 하지만 마음으로는 조금씩 그 힘을 풀어주게 되면 내 마음도 풀어지지 않을까? 이것도 작은 것부터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는 사이 내 안에 있는 야생마의 기질이 조금씩 눈을 뜨게 되고 이것이 경주마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조금씩 알게 되고 느끼게 될 거야. 조금씩 넓은 들판을 거닐다가 한 해, 두 해 지나가면 서서히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멋진 야생마로 다시 변해가는 우리 40대의 모습이 되었으면 해.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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