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딴짓 좀 하겠소_9
삶이 흔들릴 때마다
그 젊은 날의 여행은 내게 힘이 되어 주었다.
삶에 지칠 때마다 사진과 기념품을 들춰 보면서
힘을 얻었다. 그 여행은 유년기의 기억처럼
내 인생의 아름다운 시간이 되어 주었다.
비틀거릴 때 나를 잡아줬고, 무료함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길로 걸어가도록
힘을 주었다.
- 문요한의《여행하는 인간》중에서 –
삶의 속도를 즐기고 있는 당신에게
이런 광고 카피가 한때 유행했던 적이 있었지. 카피라이터가 작성한 글이겠지만 이 문장처럼 직장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없던 것 같았어. 왠지 이 말을 들은 직장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여행을 떠날 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느끼게 했고 실제로는 여행을 떠나는 이유로 삼기에 충분했지. 물론 여행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처럼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기대하게 단어는 없다고 생각해. 지금도 말이야.
여보, 당신은 ‘여행’하면 무엇이 생각나는 것 같아? 40대 중년들에게 여행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대표적인 것이 무더운 여름에 떠나는 휴가가 대부분일 때가 있었지. 중년들의 30대에는 봄에 가는 꽃놀이나 가을에 가는 단풍여행은 사치일 뿐이었고 여름에 가족들과 시간을 맞추어 가는 여름휴가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아. 그리고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면 준비하는 것부터 많고, 오래간만에 시간을 내었기에 매우 빡빡한 일정으로 보내기 일쑤였던 것 같아. 어쩌다 해외여행이라도 갈려면 회사 일정보다 더 타이트하게 시간을 정하고 즐기기보다는 의무적으로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 가서 재미있는 놀이와 추억을 만들기보다는 어디를 갔다 왔네 하는 증거를 남기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었고 가장의 역할을 잘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이 대부분이었을 거야.
이렇게 바쁜 여행마저도 마음대로 갔다 오지 못한 중년들이 꽤 많이 있었지. 경비 문제는 둘째 치러라도 아이들 학원 일정을 맞추다 보면 대부분 7월 말이나 8월 초에 전 국민이 동시에 휴가를 가는 일이 발생했지. 더군다나 나 혼자 가는 여행을 꿈꾼다는 것,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 속의 일이었을 거야. 이제는 마흔이라는 나이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런 상상을 꿈꾸게 하게 하는 것 같아. 가족들과 같이 가는 여행도 중요하지만 어쩌다 가끔은 나 혼자 떠나는 여행이 필요한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어. 물론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들도 말이야. 아내들은 혼자서 휴가를 가라고 하면 남편들이 아이들을 다 데리고 집에서 나가는 것을 오히려 휴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가정과 회사의 책임에서 벗어나 잠시 모든 것을 오프 모드로 전환하고 혼자만 가는 여행을 시도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 아마도 우리 마음속에서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소망이었을지도 모르잖아.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금지된 소망’이었을지도 모르지. 혼자 떠난다는 것만 생각하면 흐뭇하고 즐겁지 않은가? 특히 아내와 아이들을 내가 챙기지도 않고 여행 간다고 무엇을 챙길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저 입을 옷 몇 가지만 가지고 출발하기만 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 말이야.
여보, 중년들이 혼자서 떠난다는 여행에 끌리는 이유는 그동안 어깨에 맨 심리적인 ‘짐’이 무거웠기 때문일 수도 있어. 혹은 회사와 가정에서 맡은 역할로 인해 자기 다운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지. 그동안 역할에 맞는 가면에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감추고 오직 책임에 맞는 삶을 살아왔지. 거기서 벗어나면 무책임하거나 불성실하게 느끼는 생각이 우리를 더욱 여행과 먼 삶을 살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최근에는 여행이란 것이 쉽게 떠날 수 있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 TV을 보더라도 연예인들이 단체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예전부터 일요일 밤에 우리를 TV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던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이 대세일 때도 있었지. 1박 2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행을 간 것 같은 기분이 조금을 들 때가 있었고 때로는 방송된 곳으로 직접 가보기도 했는데 말이야.
여보. 지금은 여행을 가기에 너무나도 편리한 시대가 되었지. 여행에 필요한 비행기 표와 호텔도 휴대폰 하나면 언제 어디서든지 검색과 예약이 가능하여 돈과 시간만 있으면 떠날 수 있는 여행이 대세가 되었어. 여행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시대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중년들은 여행을 떠나는데 거창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나도 거기에 포함되지만 말이야. 40대에 가는 여행은 그리 번잡한 곳이 아닌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갔으면 해. 그동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리저리 치였기 때문에 이제는 혼자만 행동하고 혼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이 우리들이 떠나고 싶은 진정한 여행인 것 같아. 우리가 유명한 연예인이 아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면 그보다 자유스러운 곳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곳에 가면 핸드폰이나 SNS를 Off 모드로 놓고 여행 안내서와 지도와 오직 나만 들여다보는 여행이 필요한 것 같아.
자기만을 들여다보는 시간, 고독한 시간을 즐기는 것은 아마도 최고의 여행일 수 있어. 故 구본형 선생님은 여행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며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맞는 것’이라고 했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익숙하게 지내온 것에서 잠시 떠나는 용기일 뿐이야. 마음은 늘 떠나고 싶은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그 현실을 이겨내고 나가는 사람만이 여행의 참 맛을 느끼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이 오고 가는 시간을 포함해서 1주일 정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항상 그 기간 정도를 쉽게 수시로 내기가 쉽지 않고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잖아.
이제는 여행의 개념을 바꾸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 힘든 40대의 삶을 살면서 그렇게 긴 시간을 내기기 현실상 쉽지만은 않지. 여행을 짧게는 오전 근무를 마치고 떠나는 반나절 여행, 또는 새벽에 출발해서 밤늦게 오는 하루 여행, 또는 금요일 밤에 떠나서 1박 2일 또는 2박 3일의 여행도 고려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우리 삶에 여행이란 숨구멍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같지 않아.
여행 장소 또한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아. 우리가 살면서 가보지 못한 숨은 장소가 곳곳에 있어. 점심 먹고 차를 끌고 2-3시간 가면 낯선 곳에서 저녁을 먹고 올 수 있는 곳이 꽤 많더라고. 하루라는 시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가까운 일본도 갔다 올 수 있지. 젊은 친구들은 사전에 티켓팅을 해서 일본에 가서 점심 먹고 구경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친구들도 있더라고. 그렇게 짧은 시간을 내서 일상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으로 충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
여보, 우리가 말하는 해외여행, 장시간의 여행은 사전에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취할 수 있는 짧은 여행의 참 묘미는 답답할 때 즉시 떠나는 맛에 있을 것 같아. 문득 하루가 힘들면 잠시 일을 뒤로 미루고 나를 찾아 떠나는 ‘즉시 여행’을 가져보는 것은 어때. 남들은 다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떠나는 그 묘한 기쁨, 그리고 낯선 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풍경도 우리를 Refresh 해주는 묘미가 있을 것 같아. 반나절 여행이나 당일치기 여행을 늘 새로운 곳으로 갈 필요는 없잖아. 자기 마음이 안정이 되고 곳이나 바다를 보러 늘 동해를 가는 것도 나름대로 좋은 코스 여행이 될 수도 있어. 갈 때마다 장소가 갔더라도 만나는 사람과 보이는 풍광은 늘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같은 장소도 사계절 가면 갈 때마다 다르지 않을까?
여보, 일을 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그 마음을 즉시 실행에 옮기는 용기도 마흔 시절을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이지 실험인 것 같아. 마음속에 있는 여행 풍선에 바람이 가득히 채우고 자연스럽게 풀어주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는 거지. 거기서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는 것도 여행이 맛이 아닐까 해. 거창하게 여행이라는 단어로 부르기보다는 잠깐 탈출이라고 부르자. 제주도 해녀들이 자맥질로 바다에서 일하다가 숨이 차서 바다 위로 떠오를 때 ‘후~우’하고 크게 쉬는 숨처럼 말이야. 금요일 오후에 가까운 근교 바닷가를 가서 바다를 바라보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오는 서넛 시간의 일탈, 무박 2일의 먼 동해 바다를 보고 오는 것도 괜찮지. 이러한 것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구를 잠시나마 잠재우고 해소할 수 있는 숨구멍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해. 단지 생각나거나, 일에 숨이 차면 숨을 고르기 위해 무작정 떠나는 용기가 필요할 때이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