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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Apr 08. 2021

속도를 잃으면 풍경을 얻는다

하프타임, 이제는 잠시 멈춤_7

 

좀 늦게 가는 것이 
 창피한 일은 아닙니다.
 사막의 낙타는 천천히 가기에 
 무사히 목적지에 닿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과정이 있는 법이고, 
 그 과정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만이
 결국에는 값진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이정하의《돌아가고 싶은 날들의 풍경》중에서 –



같은 길을 혼자 걷는 친구에게


당신이 나에게 고치기를 바라는 습관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그중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밥 먹는 속도를 최대한 늦추라는 것 일거라 생각해. 반대로 나도 당신에게 고치기를 바라는 습관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알고 있어? 그것은 무엇을 준비하든 무엇을 하든 좀 빨리 했으면 하는 거지. 어떻게 보면 우리는 약 22년간을 살아오면서 서로에게 고칠 수 없는 것을 서로에게 고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지 않아? 난 좀 천천히 하고 당신은 약간 서두르면 환상의 커플이 되지 않을까?


왜 서로에게 고치기를 바라는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줄 알아? 여기에는 당신과 나, 서로가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고치기를 바란다는 데 있어. 기질이나 습관은 고치기가 매우 힘든데 말이야. 밥을 빨리 먹는데 익숙한 나에게 천천히 먹기를 바라고 나는 당신에게 어떤 것을 할 때 좀 더 속도를 높여서 하길 바라지. 여기에는 핵심은 속도인 것 같아. 이미 몸에 익숙할 정도로 습관이 되어 쉽게는 고쳐지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좀 더 노력은 해 보아야 할 것 같아.


식사하는 속도에 대해서 변명을 하자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 내가 밥을 빨리 먹게 된 것은 아마도 대학교나 군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 일거야. 그래도 대학생 때에는 빨리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ROTC 훈련을 받으면서 10명이나 20명이 같이 식사하러 가지.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가 같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여유 있게 밥을 먹을 수 없었거든, 특히 더운 여름날 식당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기들을 생각하면 최대한 식사시간은 짧게 줄여야 하기 때문에 빨리 먹는 습관이 들었지. 군대 가서도 이런 식습관은 계속되었던 것 같아. 회사에 들어가서도 보통 10명 정도 되는 동료들이 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면 한 가지 빨리 되는 메뉴를 선택해서 같은 테이블에서 같이 식사를 시작하고 같이 일어나다 보니 빨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얼마 전 음식 치료 세미나 등에 참석해서 음식을 정말로 천천히 먹는 것을 실천해 봤어. 기존에 밥 먹는 것과 다른 묘미가 있더라고. 음식을 천천히 씹고 음식을 조금씩 먹다 보니 많이 씹게 되고 천천히 먹다 보니 혀에서 느끼는 음식 맛이 다른 것을 느끼게 되던데. 특히 채소 등을 먹을 때에는 채소에서도 단맛이 나는 것을 느끼고 꽤 

놀랐어. 천천히 먹게 됨으로 빨리 먹으면서 놓쳤던 느낄 수 없었던 음식 맛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할 수가 있었어. 이때 한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지.


여보, 내가 너무 인생을 빠르게 살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되더라고. 빨리 간다고 누가 우리에게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물론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그런 것 같아. 우리 요즘 시대가 무엇이든 빨라야 최고이고 능력을 인정받고 제 값을 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 때문에 우리들도 거기에 자동적으로 습관이 들은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빨리 해야 남보다 많이 할 수 있고 그러면 더 많이 해서 능력을 인정받고, 돈도 빨리 벌어야 집도 크게 넓히고, 아이들은 빨리 선행학습을 해야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에 젖어들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당신이나 나 또한 그런 사회 풍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음식을 빨리 먹으면서 음식의 숨은 맛, 본래의 맛을 놓친 것처럼 내가 살면서 혹시 놓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게 되더라고. 내가 빨리 해서 아쉬운 것은 우리 두 아들이 커가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거야. 두 아이 벌써 커서 나보다 키가 큰 상태로 나를 내려보고 있다는 거지. 어느새 커서 이 아이들과의 어렸을 때의 추억이 별로 없다는 거야. 큰 아이 때는 어렸을 때 나름대로 같이 지내려고 했지만 둘째 때는 회사에서의 위치도 있고 해서 오직 회사 일에 미친 듯이 일하느라 우리 둘째가 커나가는 것을 제대로 못 보고 못 느꼈다는 거지. 아이들이 천천히 커나가고 있었을 때 내가 삶의 속도를 줄이고 옆에서 커가는 것을 제대로 못 본 것이 아쉬운 생각만 들어. 이제는 중학생, 대학생이라 우리와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 않으니 그런 녀석들하고 같이 놀자고 하면 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나 모르겠어. 왜 갑자기 그러냐고? 모든 것이 때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어.


그래도 당신은 나보다 아이들이 크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을지도 모르지. 아마도 우리나라의 아빠들이 나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아빠들도 할 말은 많은데 말이야. 더 열심히 해서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했다고 변명하면 비겁한 변명이 되려나? 지난 것은 어쩔 수 없어 이제부터는 아이들과 당신,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려고 마음먹고 있어.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고, 그리고 같이 보내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 그래서 두 놈과 같이 목욕탕에 일부러 가는 것도 나의 숨은 의도의 일부이지. 같이 한 공간에서 발가벗고 한두 시간을 보내면 그냥 뿌듯한 것 있지. 얼마큼 컸는지도 눈으로도 확인하고 서로 때도 밀어주다 보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방법이야.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이 녀석들도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자연스럽게 아들들과 목욕탕에 가게 될지도 모르잖아. 우리 부모세대가 자식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시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듯해. 


여보. 우리가 빨리 살기 위해서 삶의 속도를 올리면 올릴수록 삶의 묘미를 그만큼 잃어버리는 것 같아. 어차피 삶의 수레바퀴는 내가 빨리 산다고 해서 빨리 굴러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천천히 산다고 해서 늦게 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래서 삶의 속도를 이제는 자연스럽게 맡기고 안달하지 않고 느긋하게 살려고 해. 그러면서 삶이 내게 보여주는 풍경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속도와 디테일은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에 이제부터는 삶의 속도를 즐기려고 해.




예전에 슬로우 시티라고 불리던 ‘증도’로 여행을 갔던 것 기억나? 그때 두 아이들과 모처럼 같이 간 가족여행이잖아. 염전에서 소금을 거두어들이는 모습과 넓은 갯벌에서 짱뚱어를 잡기도 했었지. 그때 여행은 어디 가서 사진 찍고 빨리 차 몰고 다음 코스 가서 사진 찍고 또 이동하지 않고 오직 증도 안에서만 돌아다니느라 해지는 모습도 보고 해 뜨는 모습도 보는 여유가 있는 여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정말로 천천히 가는 여행을 한 기억이 오래 유지되는 것은 천천히 시간을 보내서 일거라 생각해.


지금이라도 증도 여행처럼 먹을 것도 천천히 시간 들여서 먹고 구경하는 것도, 사진 찍는 것도 여유를 가지고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애들이 어렸을 때 많은 곳을 데리고 다녔지만 많은 곳을 기억하지 못해서 어렸을 때 여행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아이들이 기억하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지 못하고 숙제하듯이 빠른 속도로 돌아다녔기 때문일지도 몰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건물을 빨리 짓는 것으로 유명하잖아. 그런데 스페인에 갔을 때 거장인 가우디가 짓고 있는 성파밀리아 대성당은 아직도 짓고 있었어. 가우디가 짓기 시작하면서 다 완성하지 않아 앞으로도 10년 정도를 더 지어야 완공된다고 해. 그래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건축물이 되고 많은 전 세계 사람들을 지금도 바르셀로나로 끌어 모으고 있지.


여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남은 지는 모르지만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하면 당신이 나보다 더 오래 살겠지만 앞으로 살아온 만큼 산다고 할 때, 이제는 천천히 살아가자. 그리고 세심하게 잘 보고 느끼면서 살자. 음식도 천천히 맛보며 아직 맛보지 못한 것도 먹으면서 말이야. 그리고 세월이 나에게 선사하는 많은 풍광을 제대로 보려고 해. 아마도 거기에는 내가 못 보고 지나친 삶의 풍광들이 다시 반복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당신이 내 곁에서 천천히 나이 들어가는 모습과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천천히 보려고 해. 그러다 보면 내 밥 먹는 속도도 느려지겠지. 아니 늘어나는 뱃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밥 먹는 속도를 슬로우 비디오 모드로 바꾸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조금이라도 음식을 덜 먹게 되니까 말이야. 천천히 느리게 여유 있게 살자. 그러면 오래 사는 것처럼 느낄 것 같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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