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책인 이 소설은 슬프지만 해피엔딩이다

대니얼 키스,『앨저넌에게 꽃을』를 읽고

by 고독일기




오늘도 죽어버린 시간에 아파하는 수많은 엘리스를 위하여



책을 덮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내 애정템 미니언즈 AI 스피커에 음악을 부탁한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 틀어줘" 알고리즘은 잠시 뜸을 들이고 신중하게 곡을 고른다. 오호 이 곡 분위기 괜찮은데.. 곡명이 궁금해 검색해 보니 제목이 '엘리제를 위하여'다.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심정들이 피아노 선율에 잘 담겨서 다시금 스토리를 더듬어본다. 어쩌면 기적이라 불리는 순간들은 늘 옆에 있지만 익숙해서 못 알아챘는지도. 똑똑해진다면 더 잘 알아차릴까? 고든이 머무르던 집에 있던 피아노는 어떻게 되었을까? 좋은 주인을 만나서 아름다운 곡을 들려주었을까? 아니면 수명을 다하고 먼지 덮인 채 있을까?




초반 전주가 신비롭게 귓가에 울린다. 시작은 Andante(안단테, 천천히 걷는 빠르기로)


책 처음부터 ‘마춤법이 마니 안마즌 그를 일그니 무척기나 신기했다.’ 날마다 써 내려가는 일기에서 조금씩 철자가 맞아가는 걸 보면서 고든의 성장 서사가 직관적으로 눈에 보인다. 신기하게도 철자는 틀려도 비문은 보이지 않았다. 살아가는데 철자는 중요하지 않구나. 문맹률이 높은 국가가 성장이 더디다는 주장은 사람의 업무능력을 평가할 때도 잣대로 쓰이는지 심히 궁금하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뭘까? 무리에 적응해 소속감을 느끼면 정상이고 무리에서 쫓겨나면 비정상인으로 취급한다.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우리는 비정상이라고 규정해 버리기도 한다. 어린 아인슈타인도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면 찰리처럼 저능아, 도태아라고 놀림받지 않았을까? 남을 함부로 비웃는 사회를 우리는 정상이라고 착각하며 살기 쉽다. 일론 머스크를 사기꾼으로 공격했다가 지금은 어엿하게 전기차를 만들어내고 회수되는 로켓을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남을 비난하기 무척 쉬운 세상이다. 안 되는 이유를 찾아 끌어내리긴 더 쉬우니깐 말이야. 주변의 조롱에도 고든은 계속 실험실로 셀레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먹이를 넙죽 받아먹으려는 게 아닌 그저 사랑을 받고 싶어 스스로 쟁취하러 간다.




중반부터 강렬한 crescendo(크레센도, 점점 강하게)


수술을 무사히 끝마친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똑똑해질수록 표현력이 풍부해진다. 5세 유아 수준의 일기는 어느새 박사 수준의 레포트처럼 어렵게 읽힌다. 각종 학문분야와 전문용어를 쓰면서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듯 써 내려간다. 일종의 실험체인 자신의 오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치료받기 싫다는 그는 과학이 아닌 세상이란 넓은 분야에선 자기 자신도 오류를 범한다는 걸 간과한 채 질주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다던 그의 순수함은 지식을 마구 먹어치우면서 오염되어 갔다. 아는 게 많아지나 그는 계속해서 고립된다.


새로 보이던 세상은 그에게 아름답지만 않았다. 친구를 잃고 일자리를 빼앗기며 방황한다. 엘린저는 고든과 함께 있어서도 실험실에서 했던 미로를 계속 탐험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구조화된 미로를 탐험하는 엘린저와 달리 고든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보이지 않는 벽에 계속 아파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을 만나면서 성숙해져 간다. 압도적인 지식으로 대학교수의 입을 답게 한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조건 없는 인간관계를 원한 그는 정말 상대에게 바라는 게 없었나? 대화가 안 된다고 엘리스를 피한 그가? 담백한 관계를 핑계로 가벼운 사이를 원해 페이를 만난 건 그만의 창으로 그려낸 조건이 아닌가? 이런 모순을 순순히 인정하든 잘난 머리로 변명을 하든 그를 불편하게 했다면 난 미소를 지을 거다. 고든, 사람이 되었구나.




끝을 향해가는 staccato(스타카토, 음의 길이를 줄여 짧게 끊어 연주)


그의 기억은 뜨문뜨문 소실되고 운동능력은 갑작스레 마비되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준다. 엘리스에게 화를 내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가지 않고 끊어냈다. 감정을 제대로 배우지 않더라도 사랑이란 핑계로 그녀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쉼표 없이 막말을 내뱉는 자신에게 도돌이표 같이 반복해서 헌신하는 그녀를 향해 마침표를 끝내 찍어버린다. 책을 다시 보아도 그가 지식을 추구하는 장면을 잘 나타나지만 행복을 느끼는 장면은 머리에 칼질하고 똑똑해진 다음에는 잘 안 보인다. 저자가 의도해서 잘라낸 장면이 있지 않을까 뇌피셜을 써보며 그도 잠시나마 행복했으리라고 상상한다.


그가 피아노를 자신을 위해 쳤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실험체가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한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 했다. 교수들은 고든을 실험용 쥐로 취급하며 그들의 가설 이외의 변수를 두지 않으려고 고든에게 정작 중요한 걸 감추었다. 논문에 적힌 figure1,2로 지정된 종속/독립변수 외에는 그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깐 말이야. 고든은 자신을 통제하는 듯한 교수들과 주변인들의 태도에 그들의 소통 방식인 과학 지식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갈고닦아 상대의 빈틈을 찌른다. 진리의 상아탑을 피로 물들이며 최정점에 올라선 그는 말한다. 너 뭐 되냐고.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자기 연민이 더 커질 뿐 타인과 친해지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사춘기 소년 같은 고든의 마음은 현실과 다르게 좌절되어 더 아파만 간다. 감정이 이성을 따라잡지 못해 타의적 이별을 머리로 받아들여도 가슴으로는 잊히지 않는다. 인지부조화에 빠져 제발 관심 좀 달라고 울부짖는 고든을 상상해 본다. 지적 자아는 부정적인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선을 그었기에 이로 인한 반작용인 자아분열증으로 주변에 상처를 주고 자주 폭발한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니깐 외면하려는 관계를 휴대폰 케이스를 갈아 끼우듯 쉽게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없다. 그는 논문을 써낸 지식인에서 멍청이 고든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가족을 만나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교훈을 얻으면서 드디어 피해의식에 묶인 실험체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인간으로 서서히 죽어간다. 결말에 다다를수록 고든이 지적으로 퇴보해도 끝내 한 사람으로 스스로 세운 사명을 완수했기에 이 소설은 슬프지만 해피엔딩이다.




현실로 Da Capo(다카포, 곡의 맨 처음으로 가서 다시 연주)


저자는 우리에게 지식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물어본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나? 안다고 달라질까? 고든은 자신의 지적 자아가 죽어가는 걸 스스로 확신하고 나서 담담히 받아들였다. 기억과 경험이 사라져가는 걸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똑똑한 엘린저가 지워지는 과정에서 일지에는 담지 못한 수많은 고통이 있으리라.. 이 소설에 과몰입한 건 사실 나도 똑똑해지고 싶어 활자 중독자처럼 책을 쌓아두어 읽고 있다. 책에 미친 사람, 자칭 책치광이로 매년 100여 권을 책을 읽는다 한들 고든처럼 극적으로 똑똑해지진 않았지만 그가 한 실수를 비슷하게 한다. 취해서 술을 엎고 잔도 깨고 뚝딱거리며 전 여친에게 질척거린 흑역사를 떠올린다. 다음날 일어나선 사람이 실수도 해야 인간미가 있다며 자기 합리화 회로를 풀가동한다. 하루 종일 이불킥을 연달아 차며 내 안의 지킬 앤 하이드가 서로를 향해 뜨거운 설전을 펼친다. 이번 생은 NG야 망했어. 그치만 어쩌겠어? 이 모습 또한 나이고 내 선택인 걸 하하하 ;D.. 머리를 부여잡고 절망하더라도 이불 밖으로 나갈 거다. 당장 감추고 싶은 모습도 받아들여야 앨린저-고든효과처럼 스스로 사명을 세워 끝내는 완수해낼 수 있으니깐. 일단 가보자고. Carpe diem.


삶에 있어 현명하길 바라지만 고든처럼 외롭고 아프게 살고 싶진 않아. 고든은 소설 속 인물이고 나는 내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하니깐. 다행히 내 이름 석자 제목의 작가로 생명력을 잘 지키고 있으니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에서 세상을 더 만끽하고 싶다. 그가 알려준 교훈처럼 지식이 성공과 명예, 부만을 쫓으려고 매몰되기보다 좀 더 아름답게 쓰이길 원한다. 이 말 또한 하루를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에겐 오만한 이상일까? 난 세상을 발전시키는 현실감각이 뛰어난 계산과 기술에는 밝지 못한 똥멍청이라 책을 바이블처럼 들고 다니면서 읽어야 할 변명거리를 소소하게 하나 더 늘리는데 만족한다. 감명 깊게 읽은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다. 어떤 분일까? 어떻게 읽었을까? 이제는 그분의 스토리가 궁금하다.







p.s 기억을 죽이기는 쉬워도 살리기는 매우 매우 어렵다. 고든의 기억은 사라져도 그가 느꼈던 감정들은 마음에 문신으로 각인돼 지워지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 같이 쌓아 올린 순간들이 세포 소멸과 함께 도려내 졌을지라도 추억이란 기적으로 남길. 관계를 지우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의미를 주어야 하기에 꼭 그래야만 한다. 오늘도 죽어버린 시간에 아파하는 수많은 엘리스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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