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좋은 인생 나아가 옳은 삶이란 무엇일까요? 풍요로운 시대입니다. 그리고 정말 빠르게 바뀌는 사회입니다. 쿠팡이 등장하고 새벽 배송, 당일 배송이 당연시돼서 주문하면 바로 눈앞에 물건이 오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도 밖에 나가면 매력적인 상품들이 유혹합니다. 놀이공원이 따로 없죠. 이 축제에서 노는 게 즐겁기는 합니다만 한 켠으로 무언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책은 이런 화려한 현실과는 다른 판타지 같은 이야기입니다.
저자 빅터 플랭크는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는 곳에서 살아남아서 글을 썼습니다. 평범한 사회에서 누리던 의사로의 명예, 지위는 이곳에서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병에 걸려 죽을지, 간수에게 맞아 죽을지, 날아오는 폭탄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공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노동하는 인력으로서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면 죽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냉정한 수용소는 겉으로 보이는 현대 사회의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불과 1세기 전의 일인데도 말이죠. 우크라니아 전쟁을 보면 휴전 중인 우리나라에서도 겪었을 법한 일입니다. 우리가 누린 인간다운 생활을 박탈당한 수용소에서 정신력으로 산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요? 생존만이 목적이 되어버린 지옥 같은 환경에서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경험주의자인 저로서는 확 와닿지는 않지만 사선을 넘나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나 봅니다. 관리자가 실수해서 전쟁통에서 멀어지는 수용소로 가지 못한 저자는 살아남고, 먼저 떠난 사람들은 미사일 폭격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참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나약한 인간의 선택이 과연 항상 옳을까?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살 수 있을까? 죽음은 어떻게든 다가옵니다. 필연적인 시련에 저자는 내적 자유와 영적인 풍요로움을 강조합니다. 내가 원하든 환경이든,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든 고통과 허탈감에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죠. 가장 두려워해야 할 건 이런 고통이 가치가 없어 보일 때입니다. 아프더라도 두렵더라고 그 속에 있는 잠재된 의미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건 그 누구도 아니고 스스로 해내야 합니다. 왜 그런지는 지금 보는 글을 보는 정도라면 잘 이해할 거라 봅니다.
이 책에서는 사람다운 삶의 모습을 크게 3 분류로 정의했습니다. 창조적인 일을 하며 자아실현을 하는 적극적인 삶, 아름다움과 자연을 체험하면서 충족감을 느끼는 소극적인 삶 그리고 마지막은 이 둘 다 할 수 없을 때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수용소는 첫 번째, 두 번째 삶이 불가능합니다. 자기 행동의 반경이 제한되어 있고 스스로 돌볼 환경이 아닙니다. 저자는 그럼에도 선택권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위에서 말하는 의미를 찾아낸 과정 그 자체라고 말이죠.
전 지극히 환경론자입니다. 주변에 따라 제 모습이 시시각각 바뀌고 변덕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 번 흔들리는 마음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워낙에 섬세한 성향도 갖고 있지만 어떤 환경이 주어지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도 달라집니다. 이건 모든 사람이 똑같을 겁니다. 가족과 있을 때와 친구들과 있을 때 조금씩 모습이 다르니깐 말이죠. 하지만 저자는 이런 다름이 꼭 자신이 발견한 의미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용소라는 자기 가치를 발견하기도 성취하기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도 의미만큼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묻습니다.
주어진 일에 겨우겨우 막아내는 나날에서 그의 말은 머리를 띵하게 합니다.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 뭔가 허탈했던 느낌은 스스로 일은 일이다고 선을 그었을 뿐, 그 이상은 찾지 않았습니다. 고통의 대가는 돈에서 끝났습니다. 일과 나와는 아주 건조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은 의미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목표로 노력하고 투쟁하면서 동시에 책임을 집니다. 책임이란 단어는 제게 언제나 무겁고 불편합니다. 평범한 제가 십자가를 짊어지라니요? 왜요? 불편한데요? 하지만 착각이었습니다. 결과가 어떻든 앞으로의 내 모습에 체념으로 끝내지 말고 나아가는 의미를 발견하는 게 나라고 말이죠. 이 사실을 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내면이나 정신을 뜻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머리가 아파집니다. 의미를 찾는 게 익숙지 않는 뇌에게 이마저도 새로운 노동으로 느껴져 과부하를 일으킵니다. 이런 저에게 그는 따뜻하게 말합니다. 억지로 찾지 말라고 의미는 삶에서 우러나온다고. 행복과 사랑은 원하면 원할수록 잘 안 되는 건 심리학적 용어로 과잉 의도, 과잉 투사가 있어서 그렇답니다. 밤에 자야 하는데 걱정하면 오히려 날밤을 새는 거처럼 오히려 눈을 돌려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신기한 게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많이 위로가 됩니다.
어떤 사람이 될지는 결국 내 책임입니다. 인생을 두 번째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더 나은 나로 다시 태어나려면 나를 초월해야 한다. 모순적인 말이지만 나아가려는 방향은 의미라고 프랭클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는 삶은 앞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원동력이 됩니다. 물론 시련도 있겠지요. 의미를 발견한다면 고통도 하나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어쩌면 정말 당연한 걸 애써 외면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삶은 한 번 뿐입니다. 일회용품처럼 쓰이다가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기억할 좋은 질문이 제게 생겼습니다.
한줄평 : 두 번째 인생을 산다면 이렇게 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