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식 과잉

나르시시즘에 대한 오해

by 고도띠

자의식 과잉

이 단어는 익숙하다.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검열하는 것.


나르시시즘이랑은 아예

거리가 먼 사람의 이야기 같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타인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준 적이 없는데도 어떻게

그 생각들을 의식한다는 말인가?


결국 어림짐작으로

내가 타인의 생각까지 관통한다는

착각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나르시시스즘은 뭘까?

나르시시스트랑 약간 다른 개념인가?


나르시시즘은 자기에게 과도하게

몰입하고, 애착하는 심리 상태에 대한 용어이며,

나르시시스트는 그 성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그냥 비슷한 말이라고 보면 된다.


흔히들 아는 나르(시시스트)들은 공감능력 결여에

인정과 칭찬에 집착하며, 자기 중심적이고,

타인을 이용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것들도 특징은 맞지만,

사실 깊숙히 들어가보면

자의식 과잉도 나르시시즘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타인의 생각까지

간파할 수 있다는 착각.

그리고 타인조차 나의 예상안에

들 수 있다는 자의식 과잉.




나를 아는 것은

너를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걸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한 커플이 있다면

여자가 '나는 꽃을 받으면 사랑이라 느껴'

라고 생각했다.

그럼 반대로 이렇게도 생각한다.

'저 남자가 날 사랑하면 꽃을 주는게 맞아'

라고 말이다.


그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겐

요리를 대접해주고 싶어.

이번 주말에 요리해줘야겠다'


그렇게 주말 데이트 코스는

남자가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해서

요리를 해준다.

여자는 남자가 꽃을 몰래 사놨을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간다.


그러나 남자의 집에는 파스타만 있을 뿐,

여자가 기대하던 꽃이 없다.

남자는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표현했으나

여자는 남자가 무심하다고 오해한다.

뭔가 기분이 다운되어 보이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의아해한다.


이건 예시일 뿐이지만,

이런 비슷한 사건들로 남녀가 싸우고

결국 헤어지는 사연은 무수히 많다.




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좋다.

그러나 타인의 감정과 상태를

내가 전부 다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만이다.


자의식이 부족한것도 문제지만,

과잉 상태는 오히려 부족한것만도 못하다.

나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과

타인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자칫하면 나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타인에게도 접목시켜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내가 깨달은 점과 나에게 맞았던 것을

타인에게도 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그리고 내가 겪은 느낌과 경험이

타인에게도 그대로 느껴질 것이라는

오해를 통해 자의식 과잉과 나르시시즘이 시작된다.


그래서 내가 눈치를 보는 이유도

진짜 상대를 위해서 진심으로

걱정돼서 보게 되는 눈치인지,

상대가 나를 나쁘게 보는 것이라고

단정지어서 나오는 눈치인지

구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늘 들어서 안다.

나르시시스트를 조심하라고.

그러나 내가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다는

생각은 잘 안하게 된다.

왜냐면 나는 선량한 시민이라는

디폴트 값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자신을 악하고 추하다고

내려 깎을 필요는 없지만,

나와 타인의 경계를 제대로 세우고

있는지 늘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나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고,

타인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고,

타인의 생각은 그 사람의 것이다.


우리나라는 오지랖이 심한 문화다.

결혼을 안 한 사람에게

'너는 왜 결혼 안하냐? 니 나이가 지금 몇인데?

너 그러다가 결혼 못해'


내가 번 돈을 풍족하게 쓰는 사람에게

'너 그러다가 돈 못모아서 나중에

남한테 손 벌린다. 요새는 돈을 안쓰는게 위너야'


자가를 매수 한 사람에게는

'그 위치가 나중에 안오를 수도 있는데,

그런 곳을 왜 샀어? 그리고 저층은

수요가 별로 없는데, 왜 그런 층을 샀어?'


등등등

아주 무수한 잔소리와 오지랖을

가족에서부터 연인, 친구, 직장동료에게

듣곤 한다.


내 삶의 방향은 내가 잡는 게 맞지만,

타인의 방향성까지 왜 내 방식대로

교정을 하려 하는지 모르겠다면,

나의 깊은 저변에 깔린

나르시시스즘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나 또한 나르의 모습이 있었다.


결혼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지인에게


"너가 비혼주의면 연애를

하든 말든 상관없는데,

결혼할 생각이면 빨리 서둘러"

라고 말해줬는데

사실 이건 엄연히 내 기준이다.


비혼주의여도 연애를 필수로

생각할수도 있는거고,

결혼 생각이 있어도

신중하게 하고 싶을 수 있는 것이다.


내 기준과 내 경험에만 기반해서

상대의 삶의 방향에 조언을 준 것.


물론 상대가 원해서 하는 조언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겠지만,

사실 보통은 '나에게 조언 좀 해줘'

라고 시작하진 않는다.

그냥 현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하소연이나 하고 싶은 마음일 수 있는데

거기에 무턱대고 조언부터 던지니 말이다.


어떤 지인이

"나는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어. 그냥 회사 관두고

여행하면서 살려고"

라고 말 했을 때,

나의 마음 속이 답답해졌다.


30대의 가장 중요한 이 시기에

커리어도 다 버리고 그냥 놀기만 한다는

사실이 나의 가치관, 삶의 방향성과는

완전히 반대였기 때문에

상대의 판단이 틀린 것이라고 규정짓기 때문에

내가 답답함을 느낀 것이었다.


다 큰 어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그에 대한 책임만 진다면,

사실 각자의 삶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그에 따른 적절한 책임을

지는 것이 어른의 삶이 아닐까 싶다.




타인도 나와 같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레 나오는 것들이 있다.


나처럼 살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그로 인한 통제는 덤이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조언들을

마구 쏟아내곤 한다.


이게 심해지면,

결국 나르시시스트가 되는 거고,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원래부터 나르시시스트로

형성된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살아가면서 내 오만으로 인해

나르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명절에 식구들이 모이면,

친인척으로부터 듣기 싫은

인생 조언과 지적을 받게 된다.


이 문화가 어쩌면

예전부터 고착화 된지도 모른다.


심지어 친인척 어르신들이

살던 세대와 현재 세대는

많이 다르다.


그런데 본인의 환경과

패턴이 요즘 시대에도 맞을 거라는

생각으로 해주는 조언이

얼마나 유용하겠느냔 말이다.


이걸 풍자하는 말이

'라떼는(나 때는)' 일 것이다.


그리고 이 조언을 하는 순간 만큼은

뭔가 내가 상대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 같은 묘한 쾌감도 생기고,

내 삶이 정답인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아마 이 느낌 때문에

우리는 무수히 조언을 일방적으로

하거나 받게 된다.




타인과 나를 잘 구분짓고,

자의식 과잉을 줄일수록

오히려 나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경계를 그은

타인에 대해서도 더 배려하게 된다.


타인의 생각을 함부로

규정짓고, 저 사람이

나에 대해 하는 생각까지

예측하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타인의 생각은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이해하며,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물론, 그에 따른 책임은

당연히 본인 스스로 감당한다는

전제가 필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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