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박가희 Sep 14. 2020

잊혀진 여행의 어느 날

쉬어가도 괜찮아


매일매일 뙤약볕을 걸어가던 나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


이럴 때의 ‘좋은 날씨’라 함은,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햇빛,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공기, 빨래가 바삭하게 잘 마를 정도의 습도. 이 정도일 거다. 한국의 계절로 따지자면 봄의 가운데인 5월이거나, 초가을인 9월 말 정도의 날씨가 아닐까.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지만, 애석하게도 봄은 한 계절로 정의할 수 있으나 여름은 장마와 폭염 두 계절로 나뉘고, 가을은 찰나지만 겨울은 한없이 기다래서 봄을 기다리게만 한다. 봄과 가을은 짧지만 여름과 겨울은 길다.


찰나의 맑음을 위해 하염없이 꿉꿉한 장마와 무더위 그리고 추위를 견뎌야 하는 것. 어쩌면 우리도 내내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인생이 늘 파란 하늘일 수 없다면. 뙤약볕이거나 폭우 속, 둘 중 하나여야 한다면. 나는 기꺼이 뙤약볕을 택하는 쪽이었다. 젖지 않기 위해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드라이기로 빨래를 말려가며 축 쳐져 있는 것보다는, 온몸으로 불볕더위를 맞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게 나았다. 이후에는 새카맣게 타버린 손등이나 뒷목을 바라보며 오히려 뿌듯해하고 자랑스러워하기도 한다.     


‘지금의 하루하루가 모여 미래가 된다’는 그 누군가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지금의 젊음 하루하루를 낭비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쉬는 것이 곧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쉬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것이 나를 바지런하게 하기도 했지만, 또 가끔은 나를 혹사하기도 했다. (혹자의 말에 의하면 유노윤호 급의 열쩡..)        




여행은 뜻밖의 나를 만나는 시간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 여행은 뜻밖의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다.


예컨대 나는 평소에 웃음이나 긍정적인 언어에 대해 인색한 편이지만 여행을 가면 지나치는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에도 박장대소를 하고 연신 ‘예쁘다! 좋다!’를 말하곤 한다. 일상에서와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웃어주고 곧잘 이야기를 나누는 활발한 사람으로 바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상하리만치 여유로워진다. 라오스에서의 세 번째 날이 특히 그랬다.     


사실 나의 여행은 늘 큰 계획은 없다. 도시와 도시 사이의 이동과 숙소, 그리고 여행 전체의 일정 중 꼭 가야 할 곳 몇 군데를 알아두는 것 빼고는 세부적인 루트는 잡지 않는 편이다. 여행의 셋째 날은 방비엥에서 이동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기에 특히 뭘 했는지 기억이 거의 없다.  

  

사진을 뒤져봤더니 비로소 조금은 보이는 것들. 그 전날 늦은 새벽까지 방갈로의 테라스에서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셨고, 느지막하게 일어나 카약킹을 했고, 저녁엔 북적이는 야시장에 가서 신닷을 먹고 마사지를 받은 후 또다시 방갈로의 테라스에서 맥주를 마셨더랬다.    


얼마나 많은 곳에 가봤고, 많은 것을 구경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다지 춥지도 덥지도 않아 적당했던 라오스의 11월 공기.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는 사쿠라바(특히 한국인들이 많아 홍대 어느 클럽을 방불케 한다) 대신 테라스에 앉아 비어 라오를 마시며 들었던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여유로운 이 시간이 조금만 더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나의 마음. 이 정도의 기억만으로도 충분한 게 여행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라오스의 3대 관광 지역인 비엔티안, 방비엥, 루앙프라방 중에서 ‘아무것도 안 하기’ 제일 좋은 곳은 바로 방비엥이다. 라오스의 수도로 비교적 도시적인 비엔티안과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 눈 돌리는 곳마다 아름다움이 스며있는 루앙프라방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여유가 있는 곳. 그곳에서 액티비티를 즐기며 여행자들과 어울릴지, 아니면 그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지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말이다.        


유유자적 방비엥
방비엥 일정은 테라스가 다 했다 (밤이고 낮이고 요 테라스에 착붙)



잊혀질 오늘이라도 괜찮아


일상 속에서의 나는, 매일 스스로를 타이트하게 조여 가며 살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조금이라도 게을러지기 싫어서 아예 침대에 누울 시간이 없게끔 두세 개의 일을 한꺼번에 했고, 쉴 때는 가만히 앉아 티브이를 보거나 잠을 자기 보다는 산책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뜨개질이나 프랑스자수, 우쿨렐레, 피아노 등을 배우며 소소한 취미를 늘리는 타입이었다. 밤엔 영화를 보고, 감상을 기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향 집에 가서 며칠을 지낸 적이 있는데, 끊임없이 할 일을 찾아대는 나를 보고 엄마는 그냥 좀 쉬면 안 되냐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조금 다르다. 일에 시달리다 마침내 시간이 나면 며칠을 침대에서 빈둥거리기도 하고, 그런 날엔 요리를 하는 대신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기도 한다. 온종일 넷플릭스나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깔깔거리기도 한다.


밖에는 뙤약볕이 내리쬐든, 폭우가 쏟아지든 상관하지 않고 그저 여유를 즐긴다. 그것도 나름대로 계절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마냥 앉아 가을을 기다리는 것 또한 그런대로 괜찮을 테니까.    


어쩌면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내는 나날들은 라오스에서의 셋째 날처럼 미래엔 기억에서 사라지는 날이 될지도 모르지만. 잊혀진 여행의 그 날처럼 훗날 기억되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이 행복하지 않았던 날은 아니겠지. 앞으로도 계절은 무수히도 지나가고 바뀔 텐데, 그중 잊혀진 날 하루쯤은 있어도 괜찮겠지.





※ 이 여행기는 2019년 11월, 누구나 마음껏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가깝지만 먼 과거의 추억입니다.         

이전 03화 어쩌면 계속 살아보고도 싶어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라오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