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언가가 끝난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된 기분이었다.
책을 읽었을 뿐인데, 내 삶이 다시 열리는 감각. 보통 책을 덮으면 여운이 남거나 아쉬움이 뒤따르고, 혹은 그저 다음 책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덮은 뒤에도 자꾸만 그 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책은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나요?"
그 질문이 생각보다 오래 곁에 머물렀다.
우리는 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선택이 맞는지,
지금 이 길이 옳은지.
나 역시 그 질문들 속에서 자주 멈춰 서 있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지.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게 다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조금 다른 질문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인가."
질문은 고요했으나 힘이 셌다. 그 질문 앞에 서자, 지금껏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어떻게'에만 쏟아왔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책 속에는 고래가 나온다.
광활한 바다를 유영하는 거대한 존재. 작가가 고래에 주목하는 것은 그 크기나 경이로움 때문만이 아니다. 고래는 존재 자체로 자연을 사랑하며,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에이허브 선장은 묻는다.
"고래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해서 내 다리를 잘랐는가. 왜 하필 고래라는 존재가 그렇게 하게 했는가."
그 물음은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다. 인간은 어느 순간 반드시 의미를 묻는 존재라는 것. 사는 게 힘들고 허탈할 때 문득 눈물이 난다는 것.
작가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삶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의미를 묻고, 그 물음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기도 하며 동시에 해방되기도 한다. 그 대목에서 나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프루스트는 말했다. 인생에는 우리를 덮치는 다양한 사건이 있고, 그 사건들 속에서 일종의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순간이 있다고.
그는 그런 순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안다는 것은, 내가 무엇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있는지를 안다는 뜻이다.
존재의 핵심에 있는 것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든다.
그 문장을 읽으며 오래도록 멈추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카프카는 썼다. 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으니 햇빛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고. 헛된 기대에서 자유로워져라. 기대치를 낮출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비로소 허락되는 행복을 누려라.
가장 기쁜 순간.
걷다가도 그 순간이 이내 사라질 수 있음을 알라.
이 문장들은 나에게 허락처럼 느껴졌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지금 여기서 누려도 된다는 조용한 허락.
에이드리언 리치는 말했다. 문장이 좋은 이유는 나를 대변해주어서가 아니라, 나의 소망과 욕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그 말을 읽는 순간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내가 밑줄을 긋는 문장들은 늘 그런 것들이었다.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내가 잊고 있던 나를 불러내는 문장들.
그런 문장들이 나를 살게 했다.
정혜윤 작가는 라디오 PD이자 에세이스트로서 삶의 무게와 생명의 깊이를 꾸준히 성찰한다. 그녀가 바다와 고래를 이야기할 때 울림이 오는 이유는, 그녀가 세상을 더 잘 보게 해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베리 로페즈는 어린 시절부터 빛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빛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바꾸는 경이로움을 사랑했다. 모든 생명은 빛이 있기에 상처를 안고도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주 일찍부터 알았다. 신비의 가장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그는 세상의 수많은 가장자리들을 찾아 나섰다.
한 사람의 지혜는 잘 고른 동행에게서 드러난다. 존경과 경탄이야말로 내면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게 하며, 더 많은 이야기와 질문을 불러온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빛의 감각을 잃지 않는 것, 그 용기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나바호 인디언들에게는 '뷰티웨이(Beauty Way)'라는 의식이 있다. 노래하는 주술사가 환자에게 노래를 불러주어, 그를 다시 아름다운 상태로 되돌려놓는 의식이다.
사람을 자연과 교류하는 본연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 어쩌면 좋은 책도 그런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중요한 건 MBTI도, 사주도 아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렜다. 누군가에게 "나는 책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삶의 에너지는 달라진다.
어떤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 있었더라도, 사랑과 기쁨이 담긴 문장들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른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어진다.
우리는 어쩌면 무아지경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을 더 잘 보게 해주는 작가를 만난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본다.
삶의 의미는 어디선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들 속에서 조용히 드러난다는 것.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삶을 겨우 견뎌내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누리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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