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장미, 해바라기 같은 식물은 꽃과 달리 잎을 그리려면 주춤해집니다. 마주나기인지 어긋나기인지 잎맥과 잎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지 식물도감을 찾아볼 때도 있습니다. 뿌리와 줄기, 잎, 꽃, 열매, 종자로 식물이 이루어졌음에도 열매와 꽃에만 집중했던 무심함 때문이겠지요.
"능소화와 모과나무를 봤어"라고 말할 때 능소화 꽃을, 모과나무의 모과를 봤다는 의미가 숨어 있을 겁니다.
능소화엔 꽃이, 모과에는 열매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능소화에는 겨울 맨 가지로부터 난 잎도 있고 꽃이 지고 나면 달리는 열매도 있습니다. 우리가 꽃에만 관심을 둔 것일 뿐 능소화와 모과는 여러 형태로 우리 곁에 있어 왔습니다. 한순간 잠깐 피는 꽃과 열매 때문에 늘 존재하면서도 소외되왔던 식물의 줄기와 잎. 이런 '꽃과 열매의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식물이 있습니다.
호스타(Hosta)라고도 부르는 비비추에게 주연은 언제나 꽃이 아닌 잎입니다. "비비추 봤어?"라는 말속엔 비비추 잎을 봤냐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비비추는 꽃이 아닌 잎이 피는 시기가 삶의 절정입니다. 정원문화가 발달한 서양에서 한동안 비비추 정원이 유행처럼 번졌고, 꽃 색깔, 잎의 무늬, 크기 등에 따라 수많은 품종이 만들어져 현재 세계적으로 3000 종류가 넘습니다.
나무를 그릴 때 나뭇잎은 녹색, 가지는 밤색으로 칠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과와 딸기는 빨간색, 포도는 보라색, 참외는 노란색, 하늘은 하늘색처럼 사물과 색상을 획일화 시켰던 것 같습니다. 36색 물감을 열어보면 위에서 보는 것처럼 그린 계열 색상이 16개나 됩니다. 식물을 그릴 때 화가는 이 색을 조합해 더 많은 그린을 만들어내겠지요. 세상의 모든 초록색을 모두 품고 있는 비비추. 식물이란 팔레트에 뿌려진 다양한 천연염료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습니다.
비비추의 잎은 색과 형태, 질감이 다양해서 종류에 따라 가격 차이도 큽니다. 주로 촉수당 가격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원래도 높은 가격이지만 촉수가 많으면 가격이 더 높아지고, 그럼에도 구하기가 쉽지 않아 가드너들의 위시 아이템이 되고 있습니다. 제라늄 마니아처럼 최근엔 다양한 품종의 비비추를 키우는 식집사도 늘고 있습니다.
비비추는 잎 무늬가 아름다워 정원용 관엽식물로 인기가 높아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식물 종류이기도 합니다. 1800년대 이후 다양한 품종들이 육성되어 전 세계적인 정원식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비비추를 심으면 주변에 잡초가 자라지 않고, 병해충에도 강하면서 무리로 심으면 초록빛이 돋보여 정원가들이 좋아하는 식물이지요.
비비추를 이야기하면 호스타가 함께 따라옵니다. "비비추와 호스타는 다른 건가요?" "모양이 비슷한데 구분을 어떻게 하나요?" 실제로 비비추를 소개할 때 식물학자도 비비추라 불러야 할지, 호스타라 해야 할지 고민스럽다란 얘길 합니다. 국명으로는 비비추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만, 원예식물로 유통될 때 호스타란 이름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의 국가 표준 식물 목록을 보면 이 식물의 정식 명칭은 비비추입니다. 호스타라고 부르는 것은 국명과 영명의 차이지요. 생물학적 분류표를 보면 비비추 집안을 통틀어 부르는 영어의 속명이 호스타입니다.
식물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속명을 아는 것이지요. 학명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 부여되는 과학적인 이름입니다. 비비추의 학명은 Hosta longipes지요. 대개 외국에서 도입된 화훼식물의 유통명은 그 식물 학명의 첫 번째 단어인 속명을 딴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비비추나 옥잠화의 속명이 Hosta로 같은 것이지요. 이렇게 식물의 속명을 알면 키우는 법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합니다. 비비추와 옥잠화는 속명이 호스타(hosta) 라 서로 자라는 환경이 비슷합니다. 비비추냐 옥잠화냐 호스타냐 이름을 궁금해하기 전에 속명을 정확히 알아두면 식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비비추는 외래어 같지만 순 우리 말입니다. 사진에서처럼 잎이 꼬여 있어서 '비비', 어린잎을 먹을 수 있어 취나물의 '취'에서 '추'가 되어 이름이 비비추가 되었다고 합니다. 돌돌 말려 올라온 새싹이 풀어지듯 펼쳐지는 모습을 보면 비비추란 이름이 정겹게 느껴지지요.
백합과 비비추속 식물을 총칭하는 비비추는 화려한 잎 때문에 자생지가 서양 같지만, 이들의 원산지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로 식물 원종은 35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을 부모 삼아 육성된 비비추는 현재 3천 종 이상이 되지요. 우리가 도시 아파트 단지 정원이나 공원에서 보는 비비추는 이렇게 품종 개량한 재배 식물입니다.
비비추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식물 세밀화 덕분이지요. 기록을 보면 1784년에서 1789년에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였던 엥겔베르트 캄퍼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머물며 그린 두 종의 그림으로 알려졌고, 그즈음 마카오에 있던 프랑스 총독이 파리로 보낸 종자가 최초로 서양에 보내집니다. 이것을 파리 식물원에 심었는데 당시 이곳 소속 식물 세밀 화가가 비비추를 그림으로 그리고 이 그림이 삽화로 알려지면서 세계에 알려집니다.
산림청 국립수목원에선 2021년 7월에 '식물화로 만나는 비비추 특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공원이나 학교,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너무 쉽게 볼 수 있어 무심코 지나쳤던 비비추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주는 전시회였는데요. 국립수목원에는 지난 2016년 비비추속 식물자원의 다양성 보전과 활용을 위해 자생 비비추 6종과 재배품종 120여 종을 함께 관찰할 수 있는 전문 전시원을 조성했습니다.
이곳을 조성하게 된 계기가 참 아름답습니다. 이종석 서울여대 명예교수가 20여 년간 연구해온 100여 종류의 비비추 품종과 각 지역의 다양한 변이를 가진 자생종들을 국립수목원에 기증했는데요. 기증받은 비비추를 3년간 증식하면서 비비추 전문 전시원을 만들었습니다. 전시원의 영어 이름은 기증자인 이종석 교수의 뜻을 기려 Lee's Hosta Gallery입니다.
비비추는 서양에서 육성돼 원예품종이 3000종이 넘습니다. 하지만 이 수천 품종의 원종인 35종 중 6종은 우리나라 산과 들에 자생하고 있습니다. 한라비비추, 주걱비비추, 좀비비추, 흑산도비비추, 다도해비비추, 일월비비추가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특산식물입니다.
귀한 관상 가치를 가진 식물 원종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은 행운이고 귀한 자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원예 학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이를 개량하고 육성하고 있는데요. 흑산도비비추를 개량해 홍도, 은하 등 우리말 이름이 붙은 품종을 만드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옥잠화는 꽃이 왕비의 비녀를 닮았다 해서 얻은 이름입니다. 비비추와 마찬가지로 아파트 화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인 옥잠화도 속명이 Hosta 기 때문에 비비추와 족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모습도 유사한 비비추와 옥잠화는 아파트 화단에 함께 식재돼있는 경우가 많아, 꽃 색깔만 다른 같은 이름의 식물로 생각한 분도 있을 겁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비비추의 꽃은 보랏빛이며 7~8월에 피면서 꽃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총상(긴 꽃대에 꽃자루가 있는 여러 개의 꽃이 어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피기 시작하여 끝까지 핀다)으로 달려있습니다.
옥잠화의 꽃은 비비추보다 한 달여 뒤인 8~9월에 피고 흰색이며 향기가 있고 총상으로 달립니다. 6개의 꽃잎 밑부분은 서로 붙어 통 모양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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