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판단, 곶감
집을 나서며 습관적으로 에어팟 한쪽을 귀에 꽂아 넣었다. 뭐 듣지?
'…'
딱히 떠오르는 음악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직전 음악을 이어 들었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에어팟을 두고 나가보자.
에어팟 프리[!]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다 중년 부부의 언쟁이 들려왔다. 두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지만 싸운다기보다 장 보러 가는 중에 의견을 조율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분의 모습에서 오랜 세월이 묻어나 안정감이 느껴졌다.
얼마 후 버스에 올랐다.
그리곤 대각선 좌석의, 고운 분홍 빛으로 단장하신 아주머니께 시선을 빼앗겼다.
분홍 모자, 분홍 후드티, 분홍 가방… 후드티에는 어떤 영어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남자아이 이름 같았다. 처음엔 손주 이름인가 했는데 옷 사이즈는 또 어른 사이즈라 어찌 된 영문일지 잠시 생각하다 좀 전의 그 영문이름이 다시 퍼뜩 떠올랐다.
LEE CHAN WON. 이찬원. 좀 young하면서도, 유명한 트로트 가수였던 것 같은데. 아, 그분의 굿즈인가 보다! 내 시선을 의식하셨는지 아주머니의 고개가 약간 내쪽으로 돌려진 것 같았다. 그 순간,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능고등학교가 청주고등학교예요?” 버스기사님 쪽으로 던져진 질문이었다.
“여기 사람 아니라 몰라요” 퉁명한 목소리였다.
잘 못 들은 아주머니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고, 기사님은 같은 답변을 했다.
그러자 뒷좌석에서 여러 목소리의 답변이 하나로 합쳐졌다.
“신원고랑 청주고는 다른 곳이어유”
이번에도 잘 못 알아들은 아주머니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수능고등학교가 아니요?”
뒷자리 승객들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신원고 말씀이쥬? 신원고는 하안-참을 가야허고 청주고는 요 바로 앞이에유. 어디 가시는데?”
아주머니는 이후로 대꾸가 없었다.
길찾는 승객을 도와주려고 했던 다른 승객들의 친절함에 내심 감동한 가운데 다른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기사님은 여기 사람이 아니어도 그렇지, 운행하는 노선 정류장도 잘 모르나? 좀 친절하게 대해주지’
'아주머니는 답해 준 사람들한테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하는 거 아닌가...'
먼저 '충분하게' 친절하지 않은 기사님,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친절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이다. 대꾸해준 게 어디야, 일로써 하루종일 버스 운행을 하다 보면 많이 고되실 테지.
장시간 계속 앉아 있어야 하고, 수많은 승객들이 오르락 내리락, 교통체증도 있을 거고, 거리에는 시끄러운 일들도 많겠지. 어딜 가나 있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마주칠 것 같다.
이 모든 이들에게 과연 친절할 수 있을까? 나라도 못할 것 같다. 불친절한 사람 취급해서 미안해요 기사님.
다음으로 감사 인사 없는 질문자. 기껏 도와줬더니 최소한의 인사도 차리지 않는 사람들을 평소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실례했습니다.'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고마움과 미안함은 그때그때 표현하는 게 도리라고 믿는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이유가 있겠지. 말하기 쑥스럽다든가 부끄러워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내가 못 들었다든가, 들은 답변에 충격을 받아 말을 잃었다든가, 갑자기 기면증에 빠져버렸다던가...
아주머니한테도 무슨 사정이 있으셨겠죠. 목적지에 잘 다다르셨기를 바랍니다.
역시 타인의 반응은 타인에게 맡겨두는 수밖에.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반응을 결정하는 일 뿐인데... 숨을 고르며 하루를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