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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21. 2024

신사임당申師任堂

천재 화가와 부덕婦德의 상징 사이에서


2009년 6월부터 발행한 5만원권의 모델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입니다. 신사임당은 5000원권의 이이李珥(1536~1584)와 함께 모자가 함께 유통 화폐의 인물로 선정된 진기한 기록을 세웠어요. 원화에서는 최초의 여성 모델이기도 합니다.*1

오만원권 (사진: 한국은행)

신사임당은 장영실蔣英實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한 진보적 여성단체 관계자는 신사임당 선정과 관련하여 ‘바느질과 자수에 능하고, 영재교육에 특별한 결과를 냈다는 점이 우리 여성들에게 교감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대중의 인식 속에 신사임당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임당의 고액권 도안인물 선정을 응원했습니다. 화폐 도안의 인물이 남성일변도로 흐르는 데 거부감이 드는 한편 그녀가 가진 예술적 재능보다 ‘현모양처’의 모습만이 부각되어 탈락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었죠. 당시 논란이야 어찌 됐든 간에 현재 우리는 5만원의 인물로 신사임당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강릉 오죽헌 신사임당 동상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사임당은 4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훌륭한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이자, 당대 대학자를 길러낸 어머니로 우리 역사에서 사임당만큼 추앙받는 여성은 드물어요. 앞서 언급한 여성단체의 관계자를 비롯하여 일반인들에게 신사임당의 천부적인 재능은 그동안 ‘현모양처인데 그림도 잘 그렸던 여인’이란 인식이 말해주듯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는 시선이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의 모습보다 전형적인 전근대적 어머니의 표상으로 굳어진 연유는 무엇일까요.

전 신사임당필 초충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신사임당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본명은 현재 전하지 않습니다. 혹 ‘신인선申仁善’이라 전하는 자료가 보이지만, 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이율곡이 어머니의 행적을 기록한 『선비행장先妣行狀』을 비롯하여 어디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어요. ‘사임당’은 당호堂號*2로서 중국 고대 주문왕周文王*3의 어머니 태임太妊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지은 것입니다.


사임당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했으나 특히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여 조선 전기 산수화의 대가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적벽의 뱃놀이(적벽도赤壁圖)’ 등을 모사하며 화풍을 키워나갔어요. 그녀의 실력은 살아생전에 이미 당대인들이 극찬할 만큼 뛰어났습니다.

안견 「적벽의 뱃놀이」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서 신사임당을 안견 다음 가는 화가라 평했고,*4 시와 글씨에 능했던 소세양蘇世讓, 중국에서도 문명文名을 떨쳤던 정사룡鄭士龍, 접반사接伴使*5 역임 시 탁월한 능력으로 명나라 사신을 사로잡고 훗날 좌의정까지 오른 정유길鄭惟吉 등이 모두 하나같이 사임당의 그림을 극찬했습니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자손들에게도 전해졌어요. 맏딸 이매창李梅窓, 넷째 아들 이우李瑀가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쳤으며, 외손자(이매창의 아들) 조영趙嶸도 서화에 능했다고 전합니다.

매창 매화도. 오죽헌 기념관에서 보관 중입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화가로서의 면모보다 그녀의 부덕婦德*6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그 시작은 그녀의 사후 한 세기가 지난 17세기부터로 파악됩니다. 당시 서인(그중에서도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자신이 이끄는 정파政派의 결속력과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이를 더욱 위대한 인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송시열 초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 과정에서 사임당은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의 모습보다 이이를 낳아 대성현大聖賢으로 키워낸 어진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더욱 부각됐어요. 이 모습은 유교적 사회 질서의 고착화가 정점을 이룬 조선 후기로 갈수록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덕의 상징’으로서 그녀의 이미지에 쐐기를 박는 과정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 번 더 진행됐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순신 장군 성웅 만들기’ 작업과 함께 대표적인 한국의 여성상으로 현모양처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한 신사임당을 전면에 내세웠어요. 이 작업은 1970년대 중반에 구체화하여 사임당 동상 제작이 추진되었고, 사임당교육원이 설치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일반인들의 머릿속에는 ‘천재 화가 신사임당’이 아닌 ‘위대한 어머니 신사임당’이 새겨지게 되었고, 꽤 긴 시간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주 신사임당 묘 전경. 남편 이원수李元秀와 합장되어 있습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가 기억하는 사임당의 모습은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신사임당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요. 아들 이이는 자신의 어머니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자당은 평소 묵적이 뛰어났다.

7살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린 것은 세상에 흉내 낼 수 있는 이가 없다.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하고 있다.*7




*1) 한국 화폐 역사상 최초의 여성 모델이 등장한 것은 1962년 5월 발행되었다가 25일 만에 유통이 종료된 100환 지폐입니다. 당시 조폐공사의 직원과 그 아들이 모델이었다고 해요. 정작 그 주인공들은 본인들 사진이 화폐에 쓰인 걸 나중에 알았다고 합니다. 초상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부족했던 때라 가능한 이야기네요.

*2) 집의 호를 말하는 것으로, 그 집의 주인을 일컫기도 함

*3) 상商 왕조를 멸하고 주周 왕조의 기틀을 다진 인물

*4) 魚叔權, 『稗官雜記』 卷4.

*5)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던 임시 벼슬로 정3품 이상을 임명하였음

*6) 여자가 지켜야 할 떳떳하고 옳은 도리

*7) 『栗谷全書』 卷18, 先妣行狀, "慈堂平日墨迹異常 自七歲時 倣安堅所畵 遂作山水圖 極妙 又畵葡萄 皆世無能擬者 所模屛簇 盛傳于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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