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의적, 구한말의 활빈당
전근대 백성들은 흉년이나 지배층의 탐학으로 살림이 궁핍해지면 기약 없는 유랑流浪의 길을 나서야만 했습니다. 개중에는 도적盜賊으로 화하여 무리를 이루고 생활하는 길을 택하는 이들도 생겨났어요.
본디 도적이라 함은 남의 물건을 완력으로 빼앗거나 몰래 훔쳐 자기 것으로 삼는 자들을 일컫습니다. 대부분 그 무리가 작을 땐 대상을 막론하고 단순한 노략질로 끝이 나지만, 일명 수령首領을 위시한 대집단을 이룰 경우, 탐관오리貪官汚吏 등 특정 지배층을 향해 칼끝을 겨누는 일이 많았죠. 그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정당성을 찾았고, 나아가 백성들의 호응을 등에 업고자 함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삶을 연명해야 하는 백성들 눈에는, 자신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는 지배층에게 칼을 들이대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도적 무리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했을 거예요. 그들이 끝까지 잡히지 않고 탐관오리들을 혼내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 도둑들은 백성들에 의해 점차 의로운 도적, '의적義賊'의 모습으로 그려져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전하는 '의적의 이야기'는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의적은 조선 시대의 인물들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조선의 3대 큰 도둑으로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을 꼽았습니다. 모두 낯익은 이름들이죠? 바로 이들이 앞서 언급했던 ‘무리를 이루어 지배층에 대항한 도적’의 대표적인 케이스라 할 것이다.
홍길동洪吉同은 허균許筠의 소설 『홍길동전』으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입니다. 관공서 서류 견본의 '메인 모델'이기도 하죠.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11번이나 언급되는 실존 인물입니다.*1
그는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燕山君(재위 1494~1506) 때 활동했습니다. 고위 관료로 변장한 후 첨지僉知를 자칭했고, 자신의 무리와 함께 무기를 소지한 채 관청을 거리낌 없이 드나들었습니다. 대단한 강심장이네요. 그럼에도 해당 관청의 관리는 이들을 어쩌지 못했고, 중앙정부에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 이 관리들을 징벌하는 기록이 실록에 전합니다.*2
홍길동의 실제 모습에 대해서는 혁명가였다, 강력한 '빽'을 등에 업은 정치깡패였다, 잔인한 도적이었다 등 여러 의견이 있지만, 조선의 학자 허균은 자신의 혁명적 기질을 기록에 전하는 실존 인물 홍길동에 투영하여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혁명적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냈습니다. 허균이 만들어낸 영웅 홍길동의 모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13대 임금 명종明宗(재위 1545~1567) 때의 임꺽정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층인 백정이었습니다. 조선 시대 백정은 어린아이에게조차 머리를 숙여 자신을 ‘소인’이라 칭해야 했으며, 사회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차별과 멸시를 받았어요. 길에 다닐 때는 백정 신분을 나타낼 수 있도록 대나무로 만든 패랭이를 써야 했고, 통행증 없이는 이동에도 제약이 따랐죠. 심지어 입는 옷과 신는 신발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임꺽정은 이러한 부조리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었고, 그의 의지는 수탈에 지친 백성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의 세력이 한때 조정까지 뒤흔들 정도로 강성했음은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윤원형尹元衡과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모여 토벌 계획을 세웠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3 지금까지도 강원도 철원에서 임꺽정 관련 설화가 많이 전하는 것만 봐도, 그가 일반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장길산은 임꺽정과 마찬가지로 천인에 속하는 광대 출신으로 제19대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관련 기록은 10년이 넘는 활동 기간이나 그가 벌였던 일의 스케일에 비해 단출한 편입니다. 숙종 18년(1692), 장길산 체포에 실패한 현감을 벌주었다는 기사, 숙종 23년(1697)에 승려·서얼 등 당시 사회에서 핍박받던 무리들의 반역 모의에 장길산 일당이 결탁했다는 기사,*4 숙종이 장길산을 직접 언급하며 체포를 독촉했다는 기사 등이 전부예요.*5
그럼에도 장길산이 앞서 언급한 두 명과 대등한 명성을 획득한 데에는 긴 활동 기간 동안 한 번도 잡히지 않았던 신출귀몰한 행적과, 당시 사회의 하층 세력과 함께 모순된 구조를 뒤집어 새 세상을 열려고 시도했던 그의 큰 꿈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홍길동, 임꺽정과 달리 끝내 관군에게 잡히지 않음으로써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습니다.
이상의 세 인물이 후대에 의해 의적으로 재탄생한 경우라면, 대한제국 말기에 부자들의 재산을 탈취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활동을 표방하는 집단이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이 자칭한 활빈당活貧黨이라는 명칭은 1885년에 처음 확인되며,*6 점차 그 세력이 거대해져 봉건 권력으로도 근절시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전합니다.*7 그러나 조직이 체계적이지 않고 사상적으로 확고한 이념이 정립되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와해되었고, 일부는 의병 활동에 가담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것으로 변해갔다고 해요.
도적이 의적이 되는 세상, 의적이라는 영웅이 만들어진 세상은 답답한 현실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우리네 정치 현실은 매일매일 답답하기만 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내 눈을 의심케 하는 뉴스기사가 쏟아지는 요즘입니다. 작품 안에서 주인공이 공권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 사적으로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데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겠죠. 우리는 의적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언제나 꿈꾸고 있습니다.
*1) 홍길동의 한자 표기는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洪吉同, 소설 『홍길동전』은 洪吉童이라 하여 차이가 있습니다.
*2) 『燕山君日記』 卷36, 燕山君 6年 12月 29日條.
*3) 『明宗實錄』 卷25, 明宗 14年 3月 27日條.
*4) 『肅宗實錄』 卷24, 肅宗 18年 12月 13日條.
*5) 『肅宗實錄』 卷31, 肅宗 23年 1月 10日條.
*6) 『高宗實錄』 卷22, 高宗 22年 3月 6日條.
*7) 朴在赫, 1994, 「韓末 活貧黨의 活動과 性格의 變化」 『釜大史學』 19, 484~4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