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eunpa Oct 18. 2024

교육敎育

백년대계百年大計


몇 년 전 한 사립유치원 원장이 2년간 약 7억 원의 교비를 명품 구입이나 숙박업소, 성인용품 구입에까지 사적으로 사용한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던 일이 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죠. 유치원은 아이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첫발을 떼는 첫 번째 교육의 장이라 할 수 있어요. 넓게 보자면 국가 인재 양성의 시발점이 되는 곳입니다. 영유아의 보호자가 궁여지책으로 아이를 맡기는 어린이집과는 다르죠.


인간이 지식의 전파를 통해 개인의 성숙뿐 아니라 나아가 인류 문화를 발전시켜왔음을 생각해본다면 교육이 갖는 막대한 영향력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전근대 왕조에서도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은 국가적 시책으로 매우 중요하게 이루어졌어요.


고구려·백제·신라의 각축장이었던 삼국 시대에는 각국의 교육 역시 그 시대적 특수성이 반영되어 나타났습니다. 2018년 개봉한 영화 <안시성>에서 배우 남주혁은 고구려의 태학생 ‘사물’로 분했습니다. 태학太學은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고구려 제17대 왕, 재위 371~384)이 372년에 세운 최고교육기관으로, 유교 이념의 확대를 도모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고구려에는 태학 외에도 경당扃堂이라는 교육 기관이 있어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혔다는 기록이 전합니다.*1

중국길림 천추총 전경(일제 강점기 때 사진). 무덤 주인으로 소수림왕을 비롯 미천왕·고국원왕·고국양왕 등이 비정되고 있습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백제의 경우 유난히 기록의 부재에 허덕이는 만큼 고구려의 태학과 같은 교육기관의 유무를 현전하는 기록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교경전 교육을 담당했던 오경박사五經博士의 존재가 확인되는 점이나, 왕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아직기阿直岐가 경서에 능통하여 태자의 스승이 되었던 점,*2 왕인王仁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등을 전파한 것,*3 교육과 의례의 업무를 담당하는 관서인 사도부司徒部가 존재했던 점*4 등을 통해 백제의 교육 수준이 상당했을 것임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의 백제 사도부 기록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라에는 신라만의 특수한 교육집단이라 할 수 있는 화랑도花郞徒가 존재했습니다. 화랑을 중심으로 모인 젊은 청년들은 함께 학문과 무예를 수련했으며, 진흥왕眞興王(신라 제24대 왕, 재위 540~576) 때가 되면 국가적 차원에서 화랑도가 정비되어,*5 삼국 통일의 근간 중 하나로 기능하였죠. 


삼국통일 후 강력한 전제왕권 확립을 도모했던 신라 신문왕神文王(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의 업적 중에는 최고교육기관 국학國學의 설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6 국학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 인력인 박사와 조교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9년의 재학 연한 동안 성취가 미진한 자는 그만두게 하거나, 재주가 있는 자는 9년이 지나도 국학에 남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했어요.*7

『삼국사기』 신문왕 2년의 국학 설치 기사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려에는 대표적인 관학으로 국자감國子監이 존재했습니다. 고려 성종成宗(고려 제6대 왕, 재위 981~997)이 최승로崔承老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으면서 비로소 국가 운영 체계의 기틀이 마련되었는데,*8 성종 때 설치한 국자감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를 육성하는 곳으로 기능했습니다. 국자감은 입학에도 신분의 제한이 있었으며, 중심학부라 할 수 있는 유학학부는 귀족 자제만이 들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일종의 귀족 중 심적 교육 제도였어요.

『고려사高麗史』 卷93 최승로 열전 (사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조선의 ‘국립대학’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은 그 연원이 고려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균’이라는 명칭은 충렬왕忠烈王(고려 제25대 왕, 재위 1274~1308) 때 당시의 국학(국자감의 개칭)을 성균감成均監으로 개칭했던 것에서 처음 확인되는데, 그 뒤 몇 번의 개칭 후 공민왕恭愍王(고려 제31대 왕, 재위 1351~1374)이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 부르게 했어요.*9 

<서울 문묘와 성균관> 내 대성전(왼쪽), 명륜당(오른쪽)*10 (사진: 국가유산청)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太祖(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가 한양 천도 후 종묘와 사직, 경복궁 창건에 이어 성균관을 지음으로써 국자감은 조선의 성균관成均館으로 그 기능과 위상이 이어졌습니다.*11 성균관은 조선 전기 나라의 최고교육기관이자 관리 양성 기관으로 주요 국가 기관으로 기능했지만, 조선 후기 재정 궁핍과 과거제도의 폐행으로 그 위상이 많이 약화되기도 했습니다. 


전근대 국가 교육 기관 운영의 공통점은, 나라가 세워지고 통치 체제의 정비가 이뤄질 때 어김없이 최고교육기관의 설립 및 정비도 함께 추진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국가 경영에서 교육 제도의 확립은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주요시책 중 하나였습니다.


심심찮게 보도되는 ‘비리 사학’ 뉴스를 비롯해 잊을 만하면 터지는 '시험지 유출' 사고(사건이 더 맞는 표현이겠군요), 끝없는 교권 추락의 여파로 정규직 교사들이 담임 맡기를 꺼린다는 최근 기사 등을 보노라면, 이 나라 교육의 근본적인 방향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깜깜하지 않을 수 없어요. 교육자로서의 소명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학부모들의 '개념'도 올바로 잡혀야겠지요.




*1) 『舊唐書』 卷199, 東夷列傳, 高句麗; 『新唐書』 卷220, 東夷列傳, 高句麗.

*2) 『日本書紀』 卷10, 應神天皇 15年(284).

*3) 『古事記』 中卷, 應神天皇 20年(289).

*4) 『三國史記』 卷40, 雜志9, 外官.

*5)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4, 眞興王 37年(576).

*6) 『三國史記』 卷8, 新羅本紀8, 神文王 2年(682).

*7) 『三國史記』 卷38, 雜志7, 職官 上.

*8) 『高麗史節要』 卷2, 成宗文懿大王, 成宗 1年(982년).

*9) 『高麗史』 卷76, 志30, 百官1, 成均館.

*10) <서울 문묘와 성균관>은 현재 성균관대학교 안에 위치한 문묘와 성균관 유적입니다. 문묘文廟란 공자와 중국, 우리나라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대성전 구역은 제사를 위한 건물들, 명륜당 구역은 학문 수련과 관련된 건물들이 배치되었습니다. 

*11) 『太祖實錄』 卷1 太祖 1年(1392) 7月.

이전 05화 역사학자 박병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