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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16. 2024

역사학자 박병선

현대에도 영웅이 존재함을 일깨워준 인물


19세기는 서구 열강의 팽창 욕구가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실권자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나라의 문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그고(자신의 가족들과는 반대로) 서학西學*1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2 아편 전쟁 이후 프랑스는 중국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커진 것에 초조해하고 있었는데, 조선에서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자 이를 빌미로 조선을 침공하여 강화도를 점령해 버렸습니다(1866, 병인양요).

왼쪽) 척화비, 오른쪽)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승리를 거둔 양헌수 장군의 공적을 기려 세운 양헌수 승전비 (사진: 국가유산청)

그러나 프랑스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조선에게 충격적인 타격을 받아버렸고, 그간의 피로감이 더해져 철수를 결정하고 말았죠. 그들은 철수할 당시 곱게 돌아가지 않고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外奎章閣*3의 책 상당수를 불태우고 조선 왕실의 의궤儀軌를 비롯한 일부를 약탈해 갔습니다. 몹쓸 짓은 다 하고 돌아갔네요.


의궤란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을 줄인 말로, 왕실 혹은 국가의 큰 행사를 글과 그림을 이용하여 상세하게 기록한 책자를 말합니다. 의궤를 만들 때는 1부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9부 내외로 만들어 가장 잘 만든 것은 국왕이 보고, 나머지는 각 정부기관과 사고史庫 등에 나누어 보관했어요. 규장각에는 국왕의 어람용御覽用 의궤를 보관했는데, 정조 때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들어 옮겨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의궤의 대부분이 어람용 의궤였어요.

왼쪽) 강화 고려궁지, 오른쪽) 강화 고려궁지 내의 외규장각 (사진: 강화군 문화관광_ganghwa.go.kr)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이하 『의궤』)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朴炳善, 1929~2011) 선생에 의해서였어요. 그녀가 1955년 서른세 살의 나이에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된 계기는,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시절의 스승 이병도 박사의 ‘프랑스에 가거든 프랑스가 약탈해 간 의궤를 찾아보라’는 권유에 따른 것이었죠.


선생은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아 프랑스로 떠났어요. 박사 학위를 준비하던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를 시작했는데, 당시 한자에 능숙한 직원을 구하던 도서관 측에서 평소 자주 도서관을 찾던 동양 사람인 선생에게 사서직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도서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기회라 여기고 본격적으로 『의궤』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도서관 근무자들에게서 정보를 얻고자 백방으로 노력해 봤지만 조금의 단서도 찾을 수 없자, 프랑스의 모든 도서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리의 고서점들까지 뒤졌으나 모두 헛걸음일 뿐이었죠.


계속해서 허탕만 치며 지쳐갈 때쯤 그녀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의 동양문헌실에서 ‘COREEN’이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도서 한 권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이었어요. 『의궤』를 찾던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보물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직지』는 3년 동안 오로지 그것만을 연구한 박병선 박사에 의해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리게 됐고,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불조직지심체요절.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생은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원래 찾으려던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고, 이윽고 1975년 폐기할 책들을 모아두는 베르사유 분관의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창고에서 20년 동안 찾아다닌 『의궤』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생전 인터뷰에서 그는 『의궤』를 발견했을 때 너무 감동하여 온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고 회고했어요.


이제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아직 시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은 그가 『직지』에 이어 『의궤』의 존재를 외부에 알렸다는 이유로 사표를 강요했습니다. 13년 동안 몸담았던 도서관에서 쫓겨난 그녀는 개인 자격으로 열람 신청을 했지만, 도서관에서는 아예 출입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프랑스 도서관의 행태가 우리 눈에는 참 적반하장으로 보이죠? 쉽게 포기할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도서관이 열람을 허락할 때까지 매일매일 찾아가는 집념을 보였고, 결국 그녀의 집념 앞에 도서관은 하루에 한 권만 허락한다는 조건하에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외규장각의궤_명성왕후부묘도감의궤明聖王后祔廟都監儀軌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 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도서관이 문을 여는 시간부터 닫는 시간까지 식사도 거르며 『의궤』 연구에 매진하였고, 그 결실로 『조선조朝鮮朝의 의궤儀軌』를 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의궤』의 존재와 박병선 박사의 노력이 국내에 전해지자 ‘외규장각 의궤 반환 운동’이 추진됐습니다. 그 결과 2011년 6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297권에 달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대여 형태로나마 국내에 들여올 수 있었어요. 그녀의 평생에 걸친 노력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외규장각의궤_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선생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견해 내고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데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습니다. 선생은 2009년 직장암 4기 판정을 받고도 프랑스에서 한국 관련 연구와 저술 활동에 매진하다가 2011년 파리에서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그녀의 유해는 프랑스에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되었습니다.


현대는 영웅이 없는 사회라고들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머나먼 이역만리 타국에서 혼자의 힘으로 우리 모두가 잊고 지내던 역사를 밝혀내고, 끝끝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한 그녀의 모습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1) 천주교는 17세기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에 의해 서학으로 소개되었습니다.

*2)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였던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를 비롯하여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과 그의 부인인 김 씨,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가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어요.

*3) 정조는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또 다른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원래 있던 창덕궁의 규장각을 내규장각, 새로 만든 규장각을 외규장각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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