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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15. 2024

만월대滿月臺

만월대 발굴 재개를 기다리며

古寺蕭然傍御溝(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도랑 곁에 쓸쓸하고

夕陽喬木使人愁(석양교목사인수) 석양의 큰 나무 사람을 시름케 하네

煙霞冷落殘僧夢(연하냉락잔승몽) 연기와 놀은 스님의 남은 꿈에 차갑게 내리고

歲月崢嶸破塔頭(세월쟁영파탑두) 세월은 부서진 탑머리에 아득해라

黃鳳羽歸飛鳥雀(황봉우귀비조작) 누런 봉황새는 깃을 접고 새와 참새만 날며

杜鵑花落牧羊牛(두견화락목양우) 진달래꽃 떨어진 곳엔 양과 소가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신송억득번화일) 신성한 송악산이 번영했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기의여금춘사추) 어찌 지금 이 봄이 가을 같을 줄 알았으리


위 시는 조선 중종中宗(조선 제11대 왕, 재위 1506~1544) 때의 명기名妓 황진이가 지은 ‘만월대회고滿月臺懷古’입니다. 옛 영광을 찾아볼 수 없는 고려의 궁궐터를 돌아보고 느낀 감상을 노래했죠. ‘만월대’는 원래 궁궐 안의 여러 대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언젠가부터 고려의 정궁터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어요.

고려궁성(만월대) 위치도*1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고려 제1대 왕, 재위 918~943)은 아시는 바와 같이 918년 민심을 잃은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즉위했습니다. 즉위 다음 해인 919년에는 송악(지금의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송악산 남쪽 기슭에 궁궐을 지었어요.*2 일반적으로 도성의 궁궐은 평지에 짓는데 비해 만월대는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워졌는데, 이는 경사진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고려 왕궁의 규모는 남아 있는 터로 짐작할 뿐이지만, 상당히 웅장했던 듯합니다. 인종仁宗(고려 제17대 왕, 재위 1122~1146) 때 북송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의 『고려도경』*3에 그 웅장함을 언급한 대목이 있으며, 『고려사高麗史』 등의 사료에서 확인되는 건물의 명칭만도 100여 개에 이릅니다.


고려의 정궁 만월대는 태조의 창건 이후 많은 수난을 겪었습니다. 현종顯宗(고려 제8대 왕, 재위 1010~1031)은 1011년 거란의 침입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본래의 모습을 복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전보다 확장하여 대대적으로 중건을 합니다. 그러나 1126년 인종 때에 이자겸의 난으로 다시 크게 파괴되고 말았죠.

경기 개성 만월대 전경. 일제 강점기 때 모습입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후 몇 번의 중건과 소실이 반복되다 공민왕恭愍王(고려 제31대 왕, 재위 1351~1374) 10년(1361년)에 홍건적에 의해 파괴된 이후 별궁이었던 수창궁壽昌宮에 그 역할을 넘겨주게 되었고, 얼마 안 가 고려가 멸망하자 폐허인 채로 남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왕조 조선이 건국될 당시 이미 폐허였기에 조선은 이전 왕조 고려의 정궁을 망가뜨리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죠. 이후 만월대는 ‘망국의 한’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남았을 것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조선 제27대 왕·대한제국 제2대 황제, 재위 1907~1910)은 1909년 이토 히로부미의 제안과 친일파의 동조 속에 지방순행을 결정합니다. 말이 제안이지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것이었죠. 순행은 남쪽 지방을 도는 남도 순행과 평양·개성 등지로 도는 서북 순행이었습니다.


조선의 왕들은 개성을 방문하면 반드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조선 제1대 왕, 재위 1392~1398)의 어진을 모셔둔 목청전을 찾아 예를 표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빠듯한 일정 속에서 목청전에는 들르지도 못했어요.  그럼에도 들른 곳이 만월대였습니다.

경기개성 목청전 정전 전면. 일제 강정기 때 모습입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서북순행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만월대 방문이었습니다.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당연히 지난 왕조(고려)의 황폐한 궁궐터보다 목청전 방문이 먼저였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조선에 의해 멸망한 왕조의 정궁터를 순종에게 들르게 하고, 이를 사진 기록으로 남긴 일제의 의도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만월대에서 내려오는 순종의 모습입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현대에 들어와 만월대는 남북 경협의 중요한 상징 중 하나로 다루어졌습니다. 2007년 남북 역사학자들이 공동발굴의 첫 삽을 뜬 이래 2018년까지 총 8차에 걸쳐 발굴 사업이 진행됐습니다. 그동안 2013년 개성 역사유적지구의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성과가 있었고, 2015년 발굴된 금속 활자 1점을 포함하여 총 1만 7900여 점의 유물을 수습했습니다.


만월대 공동발굴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에요.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가 내놓은 대북 제재조치(5·24조치)의 여파로, 발굴단은 최소한의 유적 복구 조치도 못 한 채 긴급히 철수해야 했고, 2016년에는 북의 핵실험으로 인해 개성공단이 폐쇄됨에 따라 공동 발굴 사업 역시 중단되었습니다.


2018년 들어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남북한 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만월대 공동발굴 사업이 3년 만에 재개됐습니다. 그러나 강화된 대북제재의 여파로 큰 성과를 내기 어려웠죠. 이렇게 만월대 발굴은 남북 관계가 온탕·냉탕을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12년간 여덟 차례 추진되었고, 60%가 진행된 시점에서 멈춘 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 기록관(www.manwoldae.org)

남측 조사단은 만월대가 쉽게 방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출토된 유물 역시 북한이 관리하기에 방문조사 과정 중 사진과 동영상 등 다양한 디지털 자료 축적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자료를 토대로 2020년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디지털 기록관'이 문을 열었고, 국민 누구나 역대 발굴조사기록을 디지털 파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한편으론 발굴성과를 알리는 순회전시가 이어졌는데요, 어느덧 마지막 순회전시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2018년 제8차 발굴조사를 끝으로 더 이상 공동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남북 관계를 본다면, 언제 재개될지 요원한 상태네요. 발굴조사에 참여하는 남북의 학자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아홉 번째 만남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월대 발굴이 정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민족의 공통성을 회복하는 의미 있는 결과로 남기를 기대해 봅니다.




*1) 이상준, 2019, 「개성 고려궁성(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의 성과와 과제」, 『신라 왕경에서 고려 개경으로 - 월성과 만월대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63쪽.

*2) 『高麗史』 卷1, 世家1, 太祖 2年.

*3) 서긍이 개성에 한 달 정도 머무는 동안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지은 책으로, 정식 명칭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입니다. 흔히 줄여서 『고려도경』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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