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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24. 2024

왕건王建

대통합의 역사


918년 6월의 어느 밤, 왕건王建(고려 제1대 왕, 재위 918~943)은 자신을 찾아온 홍술弘述·백옥白玉·삼능산三能山·복사귀卜沙貴*1 등 네 명의 장군과 자신들의 운명을 놓고 긴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를 듣고 있던 왕건의 부인 유씨柳氏가 남편에게 손수 갑옷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어짊仁으로 어질지 못함不仁을 치는 것은 예부터 그리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저 역시 분발하게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금 여럿의 마음이 변하였으니 천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한 시대의 종말이 대개 그러하듯 통일 신라 말기는 그야말로 분열과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권으로 인해 지방에서는 유력 호족들이 독립된 세력을 이루고 각자의 야망을 도모하고 있었죠. 고려 태조 왕건의 집안 역시 송악(지금의 개성)의 유력 호족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왕륭王隆은 896년 당시 근방에서 가장 위세를 떨치던 궁예弓裔(901년 후고구려 건국, 재위 901~918)에게 자신의 세력 기반을 바치며 스스로 신하가 되었고,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궁예의 고려高麗*2가 통일 신라 영토 중 3분의 2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태생부터 기구했던 궁예는 지지 기반이 없이 출발했기에 늘 불안했던 마음이 점차 강박이 되었던 것인지, 스스로가 이룬 엄청난 성공에 도취되었던 것인지 점차 포악한 전제 군주의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스스로 미륵불彌勒佛이라 칭하며 자신을 신격화했고,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관심법觀心法을 앞세워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흉포함은 결국 그를 지지했던 호족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만들었고, 휘하 장수들의 충성심마저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궁예의 실정이 이어지던 어느 날, 한밤중에 왕건의 집으로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의 네 장수가 찾아옵니다. 왕건은 이들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고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였어요. 기록에 의하면 집을 나선 왕건이 궁에 이르자, 궁성 문 앞에서 왕건을 기다리던 사람의 수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합니다.*3

함경남도 안변의 궁예묘라 전하는 건물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으로, 현재 상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왕건은 즉위 후 장차 통일의 대업을 이룬 뒤의 다음을 생각합니다. 그는 신라 천년 역사와 그 아래 수많은 백성들이 갖는 의미를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친 신라적인 태도를 내세웠습니다. 927년 견훤이 고려와 우호 관계에 있는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景哀王(신라 제55대 왕, 재위 912~917)을 죽이고 국토를 유린하는 일이 벌어지자,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출병하던 중 공산(지금의 대구 팔공산)에서 견훤과 일전을 벌이게 되었어요.

경애왕릉. 견훤의 습격을 받고 붙잡혀 자살한 비운의 왕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전투에서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과 김락 등이 전사하고 고려군이 대패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930년의 고창 전투와 병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이후 양국 간의 주도권은 고려에게 완전히 넘어오게 됐습니다. 연이은 패배 이후 후백제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하여 급기야 935년에 아들에게 쫓겨난 견훤이 왕건에게 몸을 의탁해 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같은 해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신라 제56대이자 마지막 왕, 재위 927~935) 역시 왕건에게 투항하는 등 바야흐로 천하의 향방은 왕건을 중심으로 흘러갔죠.

춘천의 신장절공묘역. 신숭겸의 무덤으로, 태조가 머리 없는 시신에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장례를 치르고, 도굴을 막기 위하여 봉분을 3개 만들었다고 전합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936년 왕건은 마침내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위대한 대업을 완수했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전란에 지친 백성을 다독이고 개국 초기의 안정을 위해 분열되었던 백성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어요. 그는 이미 926년 발해 멸망 후 고려로 망명한 발해 왕자 대광현大光顯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고 함께 들어온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했으며,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 후고구려·후백제·통일 신라 출신 인물들을 적극 기용했습니다.


이러한 포용 정책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은 것이었습니다. 궁예와 견훤이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을 외치며 일어서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260년이나 지났음에도 수많은 백성들이 호응한 데에는 신라가 고구려·백제 유민을 제대로 끌어안지 못했던 점이 컸습니다. 고려의 통일은 영토적 측면뿐만 아니라 민족 융합의 측면에서 진정한 대통합의 시작을 알린 것이었어요.

경기개성 고려태조 현릉. 일제 강점기 때 모습으로, 현재는 1994년 개건으로 인해 원형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성종成宗(고려 제6대 왕, 재위 981~997) 때의 문신 최승로崔承老는 왕건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건국시조에 관해 나쁜 말을 할리 없겠습니다만, 그 내용이 매우 이상적인 지도자의 모습이라 읽어볼 만합니다. 국민 모두가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이 이런 것 아닐까요.


편안할 때에도 안일하지 않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는 공경을 생각했으며,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였다. 궁실을 낮추어 비바람만을 겨우 가리고자 하였으며, 거친 옷을 입어 다만 추위와 더위만을 막을 뿐이었다.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겼고,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예로써 사양하는 마음이 타고난 품성에서부터 우러나왔다. 더욱이 백성들 사이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었기에 뭇사람들의 진정과 거짓을 모두 알지 못함이 없었고, 갖가지 위험한 일들 또한 앞서서 내다볼 수 있었다.

(중략)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아서 그 재주가 묻히지 않게 하였고, 아랫사람을 잘 거느려서 그 능력이 발휘되게 하였으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기면 의심하지 않았고, 삿된 자를 내칠 때에는 주저하지 않았다.*4




*1) 각각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의 젊을 때 이름입니다.

*2) 궁예는 901년 나라를 세우며 국호를 고려라 하였습니다. 이를 삼국시대의 고구려 및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후고구려라 불러요. 궁예는 이후 국호를 904년에 마진摩震, 911년에 태봉泰封으로 바꿨습니다.

*3) 『三國史記』 卷50 列傳10 弓裔.

*4) 『高麗史節要』 卷2 成宗 1年 6月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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