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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23. 2024

김대건 신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


17세기 중국에서(명말·청초 시기) 포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소속 가톨릭 선교사들은 보다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서양 서적의 한역본漢譯本을 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한역본이 유입되면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가톨릭은 서양의 학문, 즉 서학西學으로 인식되며 받아들여졌고, 실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어요.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한역서학서 『천주실의』. 서양학자와 중국학자의 대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교리서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학은 애초에 학문적 관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서학을 연구하던 이들 중 일부가 자발적으로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학문의 영역을 넘어 신앙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천주교 역사상 외부의 직접적 선교 활동 없이 자발적으로 입교자가 생겨난 것은 한국의 천주교 신앙만이 갖는 독특한 성격입니다.


1783년 이승훈이 중국에서 프랑스인 그라몽 신부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뒤 이듬해 귀국하여 활동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이미 ‘전통을 바로 세우고 외세를 배격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이 제기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종교로서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역시 이어지며 천주교의 시련이 시작되었죠.

조선 후기 천주교 신앙운동을 배척하는 문헌들을 모아 엮은 『벽위편』. 천주교를 사교로 몰아 저지하려는 정부와 유교의 입장에서 정리한 사료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천주교사의 4대 박해라 하면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말합니다. 물론 기록으로 남을 만큼의 대탄압 사건이 네 건이라는 것이지, 조선의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은 계속 이어졌어요. 김대건金大建은 신유박해가 있은지 20년 뒤인 1821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치명일기』. 1866년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명단과 약전略傳을 기록한 책으로,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 주교가 간행했습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대건이 태어난 지 얼마 후 그의 가족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용인으로 이주했습니다. 김대건은 이때 프랑스인 신부 피에르 모방Pierre Maubant에게 세례를 받았어요(세례명:안드레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된 김대건은 15살 어린 나이에 함께 발탁된 최양업崔良業*1·최방제崔方濟*2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들은 7개월이라는 험난한 강행군 끝에 1837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1842년까지 신학 교육을 받았어요.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당진 솔뫼성지 (사진: 솔뫼성지 홈페이지)

교육을 맡은 교수 신부들의 눈에 조선에서 온 세 유학생들이 보인 순박함과 신심·학구열·스승에 대한 한없는 존경 등의 모습은 신학생의 자질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것이었고, 그들로 하여금 애정을 쏟도록 하였습니다. 마카오 생활 시작 후 동료 최방제의 갑작스러운 병사, 마카오 국내의 소요 사태로 인한 마닐라 피난, 아버지의 순교 소식 등 순탄하지만은 않은 환경 속에서도 김대건은 성심성의껏 유학 생활을 수행하였죠.


마카오 유학 후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한 그는 1844년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만주에서 부제서품을 받았고,*3 1845년 8월 상해에서 마침내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신부가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었어요. 페레올 주교 일행과 귀국한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천주교의 가르침을 알리고자 노력하는 한편, 더 많은 신부와 선교사들의 안전한 입국을 위해 서해를 통한 입국로를 개척하고자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용인 은이성지 김가항 성당.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은 중국 상해의 성당을 복원한 건축물입니다. (사진: 용인특례시청)

전교활동에 부단히 애쓰던 1846년 5월 김대건은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로 신부 등에게 전하는 편지와 지도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던 중 백령도 부근의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라틴어·중국어·프랑스어·포르투갈어 등 5개 국어가 가능할 뿐 아니라, 서양의 학문을 깊이 수학한 김대건의 재능은 사실 조정에서도 탐낼 만한 것이었어요. 실제로 그는 체포된 뒤에 조정의 요청으로 세계 지리 관련 서적을 제작하고, 영국의 세계지도를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김대건 신부 초상. 1984년 한국 선교 200주년을 앞두고 제작한 것으로, 서울 명동성당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정부는 김대건의 재능이 아까웠습니다. 그가 배교만 한다면, 나라의 관리로 쓸 생각도 하였으나 김대건의 신심은 굳건하기만 했어요. 그는 40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결국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아*4 25세의 나이에 새남터 형장(지금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인근)에서 순교했습니다.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사진: 새남터 성당 홈페이지)

조선에서 그가 활동한 기간은 1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성직자로서의 자질과 덕목, 헌신적인 사목활동으로 증명된 투철한 신앙심은 그의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당진 솔뫼성지의 김대건 신부 입상 (사진: 솔뫼성지 홈페이지)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의 순교성인을 선포하며 김대건을 첫 번째로 꼽았습니다. 지난 2021년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년이 되는 해로, 유네스코는 ‘2021년 세계기념인물’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지정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열렸고, 그해 8월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유흥식 대주교 주례로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 기념미사가 봉헌되기도 했습니다. 2023년에는 베드로 대성당에 성 김대건 성인상이 설치되기도 했어요. 바티칸에 동양 성인의 성상이 모셔진 첫 사례라고 합니다.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었던 김대건 신부. 그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굳건할 수 있었던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한 번쯤 생각해봄직 합니다.




*1) 김대건 신부에 이은 두 번째 한국인 신부

*2) 마카오 유학 중 위열병으로 사망

*3) 부제副祭: 가톨릭에서 사제 바로 아래에 있는 성직자로, 사제 서품 전 일정 기간 동안 주어지는 직제

*4) 군문효수軍門梟首: 조선 시대에 나라에 큰 죄를 지은 죄인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군문에 매달던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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