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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25. 2024

신미양요辛未洋擾

150년 전 조선과 미국의 충돌


구한말의 풍운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은 아들 명복命福이 조선의 임금(조선 제26대 왕·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으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권을 쥐었습니다. 그는 종교를 앞세운 서양 세력의 접근에 위기의식을 느꼈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안정시킴과 동시에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자 천주교 박해를 실행했어요. 당시 조선의 지배층 역시 신분 사회의 동요와 사회 질서의 혼란을 염려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했죠.

흥선대원군 이하응 영정 (사진: 국가유산청)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는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 8,000여 명이 처형되는 한국 천주교사에 있어 가장 큰 규모의 박해 사건이었습니다. 병인박해를 보복하기 위한 프랑스의 원정대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중에 같은 해 7월 뜬금없이 일어난 사건이 미국 무역선 제너럴셔먼호의 방문이었습니다.

전북 전주의 '숲정이<천주교순교지>'. 조선 시대 군사훈련 지휘소가 있던 곳으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던 처형장이었습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제너럴셔먼호는 민간 무역선이었으나 대포 2문과 총으로 무장한 채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당시 조선의 법에 따라 외국과의 통상을 불허하며 이들에게 조선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조선의 경고를 무시하고 장마로 불어난 강물을 타고 항행을 계속하여 이윽고 평양 만경대에 모습을 드러내었죠.


비록 조선의 경고를 무시한 행위였으나 평양의 관민들은 먼 곳에서 온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는 관행에 따라 제너럴셔먼호에 세 차례나 음식물을 제공하는 등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이러한 조선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제너럴셔먼호 승조원들은 조선의 관리를 잡아 가두고 포를 쏘는 등의 행패를 부렸고, 결국 그 와중에 조선에서 사상자까지 발생하고 말았어요. 이를 참을 수 없었던 박규수는 공격을 결정하여 배를 불태워버리고 선원을 몰살했습니다.

박규수 초상 (사진: 실학박물관)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구한말 외세 침략의 시발점이 되었던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건 발생 두 달 뒤, 프랑스군이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강화도를 침략하는 병인양요丙寅洋擾(1866)가 일어났고, 프랑스 침략 2년 뒤인 1868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 한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조선에서의 서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극에 달했어요.

충남 예산의 남연군묘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윽고 제너럴셔먼호 사건 발생 5년 후인 1871년, 조선의 개항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을 목적으로 미국의 조선 침공이 시작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미양요辛未洋擾입니다. 미국의 공격은 병인박해가 일어난 그 해에 보복 침공을 감행한 프랑스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었는데, 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던 데다 링컨 대통령 암살 사건에 이어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 대통령이 탄핵 재판을 받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은 조선이 통교에 불응할 경우 일본에 그랬던 것처럼 포함외교砲艦外交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하게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미국의 방문을 불법 침범으로 규정했고 즉시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요구에 불응한 채 미국이 강화도 광성진으로 접근해 오자 조선이 경고성 포격을 가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되었어요.

강화 덕진진·초지진 전경 (사진: 국가유산청)

강력한 화기로 무장한 미군 앞에 조선은 덕진진·초지진·광성진을 차례로 점령당하며 참패했지만, 늘 그랬듯 외세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민족답게 결사항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수월했던 일본의 개항과 달리 조선의 끈질긴 저항에 미군은 적잖이 당황했고, 미국에 큰 이득이 될 것 없는 조선과의 전투가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는 판단하에 결국 철수를 결정합니다.

신미양요 때 활약한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 신미양요 때 미군이 강탈해 갔습니다. (사진: 퍼블릭도메인_위키백과)

병인양요에 이어 신미양요까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더욱 굳게 닫아걸었습니다. 수도 한양을 비롯 전국 각지에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하게 천명하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어요. 강력한 화기를 앞세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연이은 침략을 관민이 합심하여 물리친 조선이었으나, 2년 뒤 흥선대원군의 실각·고종의 친정(1873)에 의한 대외 정책 변화로 인해 신미양요 불과 4년 뒤인 1875년에는 자신들이 미국에 당한 방법을 그대로 흉내 낸 일본에게 너무나 쉽게 개항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근대적 조약 관계에 무지하다시피 했던 조선을 일본이 야금야금 집어삼켰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강화 광성보 내 신미순의총. 신미양요 당시 광성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들의 무덤입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나라 안팎으로 혼란이 날이 갈수록 가중되고 있습니다. 나라 밖으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고, 중동의 정세도 여전히 긴박하기만 합니다. 북한은 러시아에 군사 지원까지 한 모양이고요. 국내 상황도 여전히 시끄러워요. 국론 분열이 극심해 '심리적 분단 상태'라는 말까지 들리는 요즘입니다.


신미양요가 발생한 지 150여 년이 지났습니다. 나라가 안에서 분열하면 외세의 침략에 속수무책이 됩니다. 150년 전 관민官民이 하나가 되어 제국주의 열강에게서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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