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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eunpa Oct 30. 2024

절대권력, 절대부패

스트롱맨의 말로


현대 정치에서는 강력한 리더십과 권력을 휘두르며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외교적 절차를 무시하거나, 직설적 화법, 강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국가 지도자를 가리켜 '스트롱맨'이라 부릅니다. 그 예로 거론되는 대표적 인물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 주석,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 등이죠.


특히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세계적 비난을 받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2018년 4선 성공 당시 76%라는 압도적 득표율을 기록했습니다. 당시 일종의 문화현상으로까지 해석되던 푸틴의 인기는 강한 소련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향수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었죠.


권력의 집중은 독재로 흐르기 쉽습니다. 잡기 어려운 만큼 손에서 놓는 것 또한 쉽지 않기 때문이겠죠. 또한 시작이 어떠했든 그 끝이 결코 아름답지 않았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변국들이 중국과 러시아를 보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입니다. 한국사 속에서도 절대 권력의 변질과 비참한 말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통일 신라 말의 궁예弓裔. 불우하게 태어났음에도 원대한 꿈을 품고 기어이 난세에서 일국을 이뤄낸 인물입니다. 그가 활약한 통일 신라 말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왕권과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는 도적들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사료에 의하면 궁예는 자신의 군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으며, 상벌에 있어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합니다.*1 그가 난립하는 지방 세력을 평정하고 전국의 2/3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안성 칠장사 경내 전경. 궁예가 유년기를 보냈다고 전하는 곳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신의 성공에 도취된 탓이었을까요. 후삼국 시대의 세 나라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궁예는 국가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2이라 칭하며 신정적 전제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관심법觀心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반역자들을 색출하는 데 이용했고, 자신이 쓴 불경佛經을 비판하는 승려 석총釋聰을 철퇴로 내리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공포정치 아래에서 목이 언제 날아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신하들에게 충성심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결국 궁예는 왕건을 앞세운 쿠데타 세력에게 쫓겨났고, 도망가던 와중에 백성에게 피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함경남도 안변의 전 궁예묘. 일제 강점기 때의 사진으로, 현재 모습은 알 길이 없습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킹메이커’들이 집권 후 몰락하는 사례 역시 비일비재합니다. 조선시대 킹메이커의 몰락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정조正祖(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 때의 홍국영洪國榮입니다. 정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로 노론 벽파(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지지했던 세력)의 견제 속에서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홍국영의 공이 으뜸이었습니다. 오로지 정조의 즉위만을 위해 일했던 홍국영은 정조 즉위 후 29살의 나이에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권력을 얻게 되었어요.

『일득록』. 정조가 대신·각료·유생들과 나눴던 대화와 전교를 수록한 책입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시 홍국영의 전횡이 얼마나 심했는지 기록에는 홍국영의 방자함이 날로 극심하여 온 조정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라고 전합니다.*3 그는 요직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元嬪 홍씨)으로 들여보냄으로써 스스로 왕의 외척이 되었어요.


그러나 원빈이 입궁 일 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홍국영은 죽음의 배후로 왕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하면서 궁궐 내의 무수한 사람을 문초하는 등 왕의 눈치도 보지 않는 듯 행동했고,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앉힌 뒤, 그를 정조의 후계로 세워 권력을 유지하려는 모습까지 보였습니다. 정조와 함께 외척을 척결하는 데 힘썼던 그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었죠.

고양 서삼릉 내 후궁묘(빈·귀인묘역) 전경. 원빈 홍씨도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사진: 국가유산청)

홍국영의 오만방자함은 든든한 배경이 돼 주었던 정조의 마음까지 돌아서게 했습니다. 결국 정조 3년(1779), 왕에게 올린 사직 상소를 정조가 즉시 허락하면서 홍국영은 모든 권력을 한순간에 잃고 말았습니다. 이때 홍국영의 사직은 스스로가 원한 것이 아닌 정조의 뜻이었어요. 실각 후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봇물을 이루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적이 있었나 싶게 실각한 지 1년 만에 강릉에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홍국영은 일세를 풍미한 인물임에도 현재 무덤조차 전하고 있지 않아요.


“권력은 부패하기 쉽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영국의 역사가이자 정치가 존 달버그 액턴John Dalberg-Acton(1834~1902)의 말입니다. 액턴은 정치권력이 민주적 절차와 견제, 균형을 갖추지 않았을 때 부패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국경을 초월하여 오랜 세월 회자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소위 ‘지도층 인사’들은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1) 『三國史記』 卷50 列傳10, 弓裔.

*2)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뒤 56억 7000만 년이 지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한다는 미래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미륵신앙은 어려운 현실의 도피처로 폭넓게 전승되었어요.

*3) 『正祖實錄』 卷7, 正祖 3年 5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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