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oi Oct 05. 2023

오후 3시와 붕어싸만코

사치스러운 감정

새벽 6시 기상이 아니라 7시 40분 기상을 했다. 깨울사람도 없었다. 급하게 아침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고 집은 고요했다. 식기 세척기 그릇을 바로 정리하지 않아도 되었고 세탁기를 돌리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헐렁한 티 셔츠에 면 반바지를 챙겨 입고 따뜻한 레몬차 한잔을 베란다 앞에서 호로록 마셨다. 어젯밤 비 온 뒤라서 그런지 하늘은 청청했다. 햇살은 따스했다.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고 있었고 주차되어있던 차들이 아파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홀로 맞는 아침은 근사했다. 여유롭고 차분하면서 자상했다. 이런 거구나... 모든 것을 갖춘 뒤 홀로 지낸 그날하루와 둘째 날 하루는 호화스러운 사치 같았다. 차를 마신뒤 두유와 맥반석 계란을 야금야금 먹고 오늘 할 일을 메모장에 적었다.


-여름옷 정리하고 겨울옷 꺼내기

-어제 빨래한 이불 정리하기

-코코 목욕시키기/발바닥 털 깎기

-다이소가서 코코옷 사이즈 교환하기 (걸어가기)


할 일이 꽤 많았다. 어제 열심히 세탁기와 건조기를 번갈아 돌려 빨아 놓은 이불들을 통풍이 잘되도록 거실과 식탁의자에 걸쳐 놓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이쁘게 차곡차곡 개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점심은 대충 나물에 밥을 비벼 먹었다. 어느새 오후 1시가 되었다. 편한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역 근처 다이소 매장까지 걸어갔다. 쌀쌀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은 환상의 궁합이었다. 반바지에 후드티는 탁월한 선택이었고 운동화를 신고 아파트 단지를 지나 쭉 걸어서 내려갔다. 가을의 공기가 반가웠다. 아파트 단지와 가로수 쪽 길에 나무가 참 많다. 도토리나무, 은행나무,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 나무를 바라보는 자체가 좋다. 난 나무를 참 좋아한다. 초록이 가져다주는 생명력과 싱싱함으로부터 난 편안함을 느낀다. 종종 인간이라는 존재 만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자연으로부터 얻기만 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산, 바다, 나무는 항시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좋고 싫음은 나의 분별이다. 큰 우주 안에 공존하고 있는 이 자연은 매우 신비롭다. 인간이라는 생물도 이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과 똑같은 과정으로 변화하고 소멸한다. 늙음, 나이 듦이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연이 계절과 시공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듯 우리 인간도 동일하게 변화하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오늘 스쳐 지나간다. 그래도 여전히 나이 듦과 죽음은 낯설고 어렵다.


코코 겨울옷을 하나 장만 했는데 이 녀석 고양이다 보니 몸이 원체 유연해서 항상 옷을 좀 작게 구입해야 했었다. 그래야지만 옷이 훌러덩 벗겨지지 않는다. 한데 이번 옷은 신축성이 전혀 없다 보니 너무 작았다. 다이소에서 코코 겨울패딩을 교환하고 왔던 길을 다시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좋아하는 하늘과 나무도 보면서, 그러다 편의점옆 아이스크림 무인점포가 보였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자주 가곤 했었다. 그 가게 옆에는 오백 원짜리 뽑기 자판기가 한대 놓여 있다. 이 자판기는 우리 아이 단골 자판기다. 발길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고 난 붕어싸만코 딱 한 개만 집어 들었다. 오늘은 나만 먹을 테니까.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시간을 보았다. 3시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야 하는 시간. 3시. 스쿨버스가 도착하는 시간 3시. 간신을 먹이고 학원이나 운동을 가야 하면 서둘러 운전기사가 되어야 하는 3시. 어떤 날은 저녁 준비까지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는 3시. 수업이 집에서 있는 날은 집안 청소까지 말끔히 끝내야만 하는 그 3시였다. 낯잠을 청하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하는 대단한 3시.


'하하' 웃음이 씨익 나왔다.


그 3시에 난 다이소를 다녀오고, 아이스크림 매장에 들어가 붕어싸만코 딱 한 개를 구입해서 꼬리부터 야금야금 먹으며 하늘 한번, 나무 한번 번갈아 보며 혼자 희죽희죽 웃으며 걸었다. 걸어오다 대추나무도 보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대추나무가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네. 어쩜 한국의 가을은 매번 이렇게 매력적일까. 홀로 온갖 감성과 감정에 푹 빠져 주체를 못 한 채 홀로 너무 행복해 버렸다. 난 이렇게 너무 행복해 버리거나 너무 우울한 마음이 불안하다. 그럴 때면 다시금 추스려 좋은 감정과 마음을 꽁꽁 붙잡아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지만 오늘은 그냥 풀어버렸다. 이런 사치를 오늘 난 나에게 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난 정리를 시작했다.


대망의 여름옷을 집어넣고 겨울옷을 꺼내는 작업을 두 팔 걷고 시작했다. 정리를 하기 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버릴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남길 것'을 찾고 나머진 다 버리면 된다. '남길 패딩, 남길티와 바지, 남길신발'을 찾기 시작했다. 여름옷에 비해 겨울옷은 두껍고 무거운 편이라 옷장안이 금세 꽉 차버렸다. 아이옷은 더 이상 사이즈가 맞지 않아 버릴 옷이 제법 많이 나왔다. 두 시간 반 정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헌 옷수납함에 한 무더기를 가져다 넣고 청소기를 밀고 코코를 목욕시켰다.



내일이면 한 사람이 돌아온다. 나의 오늘하루와, 또 다른 오늘하루는 평범한 하루였지만 그 평범함이 나 에겐 큰 변화 자체였다. 나에게 처음으로 충실했다. 나를 처음으로 돌보았다. 굳이 애를 써서 이 틀간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목표도, 목적도 없었다. 하루를 보내는 삶의 태도에 집중을 했다. 해야 할 일을 그저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순간들이 행복했고 즐거웠다. 자유로웠다. 가족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항상 나 자신 안에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 집안일이라는 게 참 엉뚱하면서도 나름 개똥철학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오늘 하루도 옷을 정리하면서 얻은 만족감에 기분이 좋고 오후 3시에 딱 한 개만 사 먹은 붕어싸만코로부터 얻은 자유는 돈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사치를 맛보았다.


지금은 그걸로도 난 충분하다.


난 옷이 싫어 집사야!!


<적고나서 보니 무슨 붕어싸만코 광고 같다. 광고도 협찬도 아닙니다. 그냥 아이스크림으로 명칭을 바꿀걸 그랬나봐요. 흐미..>

매거진의 이전글 10월 4일 오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