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라도 집에서 좀 해요 해!"였다.
"다리를 벌리세요. 좌 우로 왔다 갔다 하세요."
"오른 다리를 접으세요. 팔을 위로 쭉 뻗으세요."
그의 언어다.
어느 때는 반대로 알아들어 제각기 다른 모양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도 한다. 종종 그 조차도 왼쪽 오른쪽이 헷갈릴 때도 있다. 그는 우리에게 항상 웃음을 선사해 주는 존재다.
'아사나, 다운독, 코브라, 나무, 전굴, 후굴, 박쥐, 나비 자세를 위한 준비 운동이에요'라는 씩의 친절한 설명은 없다. 심지어 그런 고급용어를 써 가며 수업을 한다 해도 우리 수업 중 그 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무시하는 거 절대 아님!!! 스포츠 센터에 오전반이라 50,60대 이상인 분들이 꽤 많아요.)
바로 다음 자세 동작이 이어졌다. 어설픈 그의 구령을 우리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몸을 앞뒤로 움직인다. 때로는 꽈배기처럼 비틀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저 전문 용어를 어떻게 아냐고?
하~도 답답하고 궁금해서 요가 관련 책을 좀 빌려 읽었다. 그 만의 독특한 요가 언어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진심 요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왜 난 갑자기 요가를 하게 되었으며, 또 왜 요가에 관한 글을 연재까지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사실 글 연재는 호기심반, 재미 반에서 시작을 했는데 점점 심각성을 느끼는 요즘이다. 난 요가에 대해 아는 게 없다.
화요일 오후쯤 'Choi 작가님~ 내일 수요일~~ 어쩌고 저쩌고~연재글' 알림을 받을 때마다 괴성을 지른다. '아니~ 벌써 수요일이야?'라고.
멍한 채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다. 눈물이 찔끔 나오지는 않았다. 단지 괴로울 뿐.
요가 관련 수필 책들은 고요하고 정적이었다. (종교 책인지 착각할 만한 책들도 있었음). 마음을 들여다 보고 호흡을 통해 감정을 알아차리는 운동이 바로 요가였다. 일상의 소란으로부터 떠나 나의 내면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요가시간이었다.
그제서야 이 늦은 나이에 왜 갑자지 요가에 빠지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요가는 운동을 뛰어넘어 요가인 들이 지향하는 철학적 삶이 있었다. 그 삶의 결이 지금 현재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과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확률적으로 합이 거의 90프로 정도 되는 것 같다. 10프로는 어디 갔냐요? 나머지 10프로는 음식 때문이다.
비록 비건은 아니지만 풀떼기를 먹고는 있다. 육류도 자주 먹고 있다. 땡초도 좋아한다. 달달한 믹스 커피도 종종 마신다. 계란도 좋아한다. 그래서 10프로가 빠졌다. 난 비건은 못할 것 같다.
그 점에서 많이 다르긴 하지만 마음을 들여다 보고 내면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나와 결이 맞는 운동으로 느껴진 듯하다.
필라테스를 이어서 할 수 없던 인연이 이렇게 요가로 이어졌다. 이 이연이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하다.
오늘도 여전히 요가수업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이젠 그 특유의 말투가 그만이 가진 요가수업 매력으로 느껴진다. 아무래도 친근한 그의 말투, 억양, 선한 얼굴 때문인 것 같다. 풍기는 이미지 랄까. 더 이상 막걸리 한잔 걸친 동네 아저씨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에잇. 길들여졌다!
"자 골반을 풀었으니께, 이제 여기 엉덩이에 손이 들어 가믄 안되는겨~"
"여기 손바닥을 엉덩이 밑에 넣어봐, 안들어가지? 안 들어가야 해. 들어가면 삐뚤어 진겨~"
"자 이어 두 발바닥을 붙이고 하나, 둘, 셋, 이마를 바닥에 대~"
"시작, 하나, 둘, ~~ 열. 멈추고 머리는 바닥에 내려놔~ 이제 닿아야 정상이란 말이여. 이때까정 풀었잖어~"
"어허이~ 큰일이네, 큰일. 지금도 안 닿으면 어째?"
"겁먹지 말고 내려와~ 한번 한 동작은 머릿속에서 인식했기 때문에 괜찮아~"
그는 괜찮다고 용기를 주고 다독여 준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두렵다. 우리 뇌가 한두 번 성공했던 긍정의 기억보다, 근육이 찢어질 듯 한 통증을 기억해서 인지 몸통은 도대체 숙여지지 않는다. 강하게 거부한다. 마치 한 방향으로 굳어진 사고와 습관처럼 말이다. 딱딱히 굳은 마음 같다.
우리 수업의 대부분은 중년 아줌마들이다. 나이 드신 분들도 제법 많다. 그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굽혀지지 않는 허리와 바닥에 닿지 않는 이마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신음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나만 안 되는 게 아닐 거야'라는 위로를 받고 싶은 우리는 서로를 훔쳐보다 눈이 마주쳐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덤으로 도넛처럼 굵게 튀어나온 옆구리 살까지 같다며 동질감도 느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선생님은 차마 우리를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어허이~~ 휴~이게 안 돼요 이게?"
"아이 참말로, 그람 이것조차도 안되면 무슨 동작을 해야 해?"
선생님의 하소연과 같은 말투, 애절함이 뚝뚝 묻어 있는 말투 때문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우리도 우리 몸이 미끄러지듯 밀려 나가고, 폴더폰처럼 뚝딱 접히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박쥐처럼 웅크렸다 쫙쫙 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있다. 그걸 선생님이 잘 몰라 주는 듯해서 우리는 서글프게 더 크게 웃었다.
하던 동작을 멈추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남자 선생님몸이 왜 저리 가냘파 보이는지. 우리 몸의 반쪽 밖에 되지 않는 그의 몸은 요가로 단련되어 날렵해 보인다. 그 길쭉한 몸을 가지고 한없이 우리를 애처롭게 쳐다본다.
"에유~ 알았어요. 고마해요, 고마해"
애절함이 묻어 있는 그의 말투다.
그 순간 갑자기 어디서 '윙~~ 웽~~'하며 큰 벌레 한 마리가 강의실을 여유롭게 휘젓고 다닌다. 선생님 앞을 지나갔다. 우리 모두 놀란 나머지 '어마마마~, 말벌이야, 말벌'이라고 소리치며 매트 위로 몸을 바짝 붙여 엎드렸다. 껌처럼 납작하게 붙였다. 다들 요가할 때 굼떴던 행동과 달리 민첩하고 재빨랐다. 어떤 분은 매트 밑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아이디어가 좋았다.
엄지 손가락만큼 큰 벌은 선생님 주변을 맴돌았고 우리는 쥐 죽은 듯 숨을 죽이고 각자의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수건 있어요? 수건?”
작은 손 수건 밖에 없었다.
창문을 열어 두었는데 그 사이로 들어온 것 같았다.
왕벌은 벽면 한 곳에 내려앉았다. 선생님은 죽비(요가강의실이 검도장 강의실과 겸용임) 하나를 집어 들고서 벌을 살포시 날지 못할 만큼만 눌렀다. 그리고 소리쳤다.
"뭐 들고 와바, 저기 저기 휴지"
앞쪽에 커트 친 키 큰 아주머니가 재빨리 휴지로 바퀴벌레를 잡듯이 단번에 벌을 휙 움켜 잡았다. 역시 우리 아줌마들은 대범하고 용감하다.
"어메, 누르면 안 돼"
그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죽잖아~ 왜 죽여~"
"이리 줘봐 봐요."
그는 서둘러 창문으로 달려갔다.
휴지를 풀어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살았어, 살았어~ 어휴, 다행이다."
"잘 날아가네~"
중년보다 좀 더 나이 가 있어 보이는 그는 순순한 시골 청년처럼 씨익 웃었다. 요가 동작을 소화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며 안타까워했던 좀 전의 감정은 잊은 듯했다. 오직 뿌듯하고 보람찬 감정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활기찬 모습으로 자리에 돌아온 그는 곧이어 다른 쉬운 동작을 알려 준다.
"집에서 그럼 이거라도 햐, 이거."
목소리에 다시 기운이 퐉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우리가 좀 더 쉽게 요가를 했으면 하는 그의 바람이 느껴진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도중 오랜만에 나온 회원에게 건네는 말이다.
"아팠어요? 독감이에요? 요가 때문에 아픈 거 아니지요?"
"빠지지 말고 나와요. 만약 화요일 못 나왔으면 수요일에 나와서 보충해요"
요가는 명상과 호흡, 스트레칭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심신 수련 방법을 말한다. '요가'라는 말은 'yuj'(결합하다)에서 시작해서 'yoga'가 되었으며 요가의 모든 과정에서 자주 나타나는 '마음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가는 맺음을 말하며 음역 하면 유가가 되고 의역하면 '상응한다'는 뜻이 된다. Patanjali가 지은 요가수트라(yoga sutra)의 제1장 2절에서는 '요가란 마음의 작용을 없애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조절해서 마음의 움직임을 억제하여 인간 본래의 고요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상태를 요가라고 한다. 요가는 종교가 아니고, 마음·몸·정신의 융화와 경험의 방법론이다. 요가는 정신적인 도구상자이고 육체적인 건강과 안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요가 [yoga] (스포츠 백과, 2008., 대한체육회)
요가책을 읽지 않고 요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였다면 아마 '참 친절한 선생님이구나 ‘, ’참 재밌는 요가 선생님이구나'에서 생각이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좀 알 것 같다.
벌을 살리고 나서 왜 그는 그토록 행복해 보였는지.
왜 그가 회원들 하나하나에 집중을 하고 마음을 써 주는지.
왜 그는 그토록 우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 가려하는지.
그가 이 스포츠 센터 초창기 멤버라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20년 넘게 이 한자리에서 그는 요가지도자로 삶을 실천하고 있는 분이었다. 진심 존경스러웠다.
처음 수업 때 마주친 그와 지금의 그는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처음 요가 수업을 들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의 시각이 바뀌었고 사고가 바뀌었다. 감히 요가인이 되고 싶다는 꿈도 잠깐동안 가져 보았다. 그 꿈을 꾸는 동안 행복했다. 저절로 다리가 늘어날 것만 같은 착각도 들었다. 도파민이 분비되었나 보다. (요즘 유행어라길래~ 한번 사용해 보았음)
다시 한번 느낀다. 인생을 끌고 가는 것은 결국 생각이다. 왜 생각이냐고? 생각에 따라 말을 내뱉고,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가 지금 현재 우리 삶이다. 물론 상황과 여건이라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 상황과 여건 또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하고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면 한결 삶을 받아들이기가 가볍다.
한때는 생각을 멈추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알아 차림' 연습이었다. 어쩌다 마주한 이 '요가'라는 운동이 호흡을 통해 마음의 힘을 빼고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 더욱 힘을 실어 주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흡을 내뱉고 들이마시면서 몸과 대화를 시작했다. 힘든 동작을 억지로 하다 보면 통증의 고통이 두려워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 긴장 상태의 나를 알아차렸다. 마음 알아차림과는 사뭇 달랐다. 어떻게? 오롯이 마음만을 들여다보는 것과 달리, 몸을 통해 마음을 알아 가는 과정이었다. 신비로웠다. 몸을 알아차리는 순간 마음까지 들여다 보였다.
몸에 긴장을 풀고 다시 힘을 빼면 나의 머리는 조금 더 무릎 쪽으로 가까이 기울어졌다. 골반 엉덩이 쪽 근육이 양 바깥으로 당겨 늘어 나는 느낌을 처음 느껴보았다. 별개의 다리처럼 조금조금씩 움직였다. 여전히 뒤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 이젠 그 아픔을 조금 들여다볼 여유가 생겼다. '관셈보쌀' 외침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어느 날, 당겨 나가는 근육을 느끼고, 통증을 알아차리다, 허벅지와 종아리 뒤쪽이 늘어나면서 눈물이 잠시 고였다. 마음이었다. 그런데 뭔지 아직 잘은 모르겠다. 다시 한번 더 만날 수 있겠지.
앞서 스스로에게 던진 두 가지 질문에 답은 얻은 것 같다.
호기심에 시작한 '요가' 연재글이 더욱 요가에 집중할 수 있는 트리거가 되고 있다. 가볍고 즐겁게 쓰고자 했던 글이 나를 다시 더 깊이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다른 각도에서 다른 방법으로 나를 다시 알아 가는 긴 여정이 시작된 것 같다.
by Cho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