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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i Aug 06. 2020

나에게 브런치는 무지개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기록장


소소한 일상, 똑같은 일상, 반복되는 일상 속에 브런치는 나만의 무지개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런 존재다.   


가끔은 비가 오고, 먹구름이 몰려드는 나의 일상에


흐릿 흐릿 한 하루하루를 아이와 함께 살을 부대끼며

나의 정체성이 ‘엄마’로 고착되어 굳어 있는 나의 일상에


자욱한 안개가 강 위에 스물스물 올라와 모든 습기를

한 번에 품어버릴 듯한 나의 일상에


폭우와 천둥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지나간 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흐릿한 몇 줄의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살짝 비추듯


나의 일상에 찾아온 브런치  


먹구름 사이에 무지개


브런치 공간은 (몇일전 생일) 생일날 미역국을 먹지 않아도, 멋진 레스토랑에서 화려한 스테이크를 썰지 않아도, 유리알처럼 영롱한 보석 박힌 목걸이나 귀걸이 선물을 받지 않아도 나에게 충만함을 안겨주는 공간이다.


어제 나의 기분이 그러했다. 먹다 남은 김치찌개 대충 데워 먹고 레드 벨벳 케이크 하나 가족끼리 쪼개어 먹었다. 계속 계속 배가 부르다. 생일이라는 이유로 부엌문 꼭 닫아 잠그고선 냉장고에 있는 반찬으로 대충 해결했다.


부엌에 들어가지 않은 그 자체 만으로도 나에겐 큰 선물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홀로 와락 가락 하고 있는 듯하다. (이거 위험한 징조인데. 아직 머리에 꽃은 달지 않았다. 혼자 희죽 해죽 웃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마음 저 아래 한 켠에 조그만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 점은 여러 번 찍히다 씨앗의 형태로 변했고 그 씨앗은 글로 변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과 열정의 씨앗. 그 씨앗은 어두운 땅속에서 거름과 함께 차곡차곡 다져지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 가늘고 길게 쭉 뻗은 빛 하나가 쑥 들어왔다. 마치 자로 그은 듯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갈라진 구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무지개 빛깔로.


그리고선 따스하면서도 온화한 브런치 공간이 터를 잡았다.

나의 든든한 울타리가 생겼다.

아.늑.하.다.


수줍지만 그 씨앗 옆에서 땅도 갈고 터도 닦아 집도 짓고 나무도 심고 잔디도 깔아, 단단하고 야무진 집 한 채 지을 생각이다. 이 새로운 집의 담벼락은 낮고 동네 사람들이 가끔은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아담한 높이다. 창 밖으로 고개를 살며시 내밀어 바깥세상과 조금씩 소통을 시작하려 한다.  


러시아 지하 벙크 안에 비친 불빛




브런치 이용 안내 매거진 중 한 칼럼이다. https://brunch.co.kr/@brunch/144 


글을 읽고 쓰는 것, 이 두 가지에만 집중하세요.


다소곳한 저 말투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저 두 가지는 그냥 할 수 있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유일하게도 저 두 가지다. 저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브런치 매뉴얼 중 제일로 좋아하는 말이다.


현재 가장 원하는 것은 그냥 글쟁이가 되고 싶다. 그냥  말 그대로 글쟁이가 되고 싶다.  


이유는 딱 하나다.

나를 위해서다. 나를 지키기 위함이다. 

살고 싶어서 적기 시작했고 어느 날부터 난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적고 있다. 매일 저녁 식탁 한 구석에서 노트북으로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들기며 아무거나 적기 시작했다. 라식 수술을한 두 눈 중 왼쪽 눈이 뻑뻑 해지고 건조증이 다시 시작되었다. 보호 안경을 집어 들었다. 영락없는 할머니 모습이다. 옆에서 남편이 아직도 놀린다. 사법 고시생 모드로 변신했냐면서. 우리 남편은 유머 감감 이 뛰어나다. 인생의 동반자로 친구로 뭐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함께 오락 프로 티비를 시청 하지 않은지도 8개월이 넘어간다.



<무식한 시작>


어느 날  문득 ‘반평짜리도 되지 않는 이 좁은 부엌 싱크대 타일 위에서 나의 생을 마감할 수 있겠구나. 이곳이 지금 내가 만들어 놓은 나의 공간이구나” 란 공포감이 온몸을 휘어 감았다. 설거지를 하다 고무장갑을 낀 채 꺼억 꺼억 울었다. 눈물 콧물이 퐁퐁 세제와 함께 뒤섞여 그릇 위로 뚝뚝 떨어졌다.


다음날 바로 무식하게 새벽 기상 4시 30분 미라클모닝을 무작정 시작했다.


그리고 앞만 보고 질주했다. 사실 나의 주 특기 이기도 하다. 하나의 목표가 보이면, 그것만 보고 묵묵히 돌진하는 습관. 중간중간에 넘어지고 다치기도 하지만, 그게 나 자신 이기에 잘 달래서 안고 살아가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은 점 중에 하나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며 조절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문화생활 하나 제대로 없는 베트남에서 살기 위해 피 끓는 젊은 청춘 20대 때 아르바이트를 밤낮 해가며 대학원 학비를 충당하고, 쌍코피 터져가며 논문을 쓰고, 좁디좁은 고시원에서 치열하게 정신없이 질주한 것이 아니다. 원하는 삶이 있었고 목표가 있었지만 이곳에서 모든 게 정지되었다. 그 삶 또한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물론 호치민 한국 국제학교에서 근무를 했지만, 열대 기후와 생활환경이 삶에 무게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살림에 ‘살’자도 모르는 새댁이 처음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기에 녹록지 않았다. 노산인 데다 깡마른 나의 체력은 버텨 주지 못했고 첫아이를 잃게 되는 아픔을 겪었다. 두 번째 임신 이후에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허약한 나의 체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어야 했고 아이가 태어났다. 그 뒤로 주방이 나의 공간이 되었다.  


주부로써의 삶은 스멀스멀 번져 나의 삶에 아무렇지 않게 젖어들고 있었다. 마치 거머리가 찰싹 몸에 달라붙어 나의 모든 피를 빨아먹듯, 부엌살림 살이는 나의 정신과 영혼을 갉아먹었다. 주부로써 아내로서 엄마로서 부엌과 친해져야만 한다는 우리나라 사회적 고정관념은 나에게 폭력이었고 나를 아프게 했다. 여전히 지금도 부엌은 나에게 힘든 곳이다.  


그 덕에 어깨 날개죽지와, 무릎과, 손가락 관절 노화가 남들보다 빨리 왔다. 작년(2019년)에 한국에서 굿모닝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셨다.


“직업이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시고, 관절을 심하게 움직여야 하는 어떤 예체능 업종에 근무하시나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나의 나이를 확인한다. 다시 한번 얼굴을 보고서는)
“혹시 피아노 치시나요?”
“네?” “ 저 가정주부인데요?”  
“아…. 나이에 비해 퇴행성 관절염이 좀 빨리 오신 듯합니다.”
“ 3층 가셔서 손가락은 테라핀  물리치료받으시고요,  많이 서있거나 무릎에 무리 가는 운동은 금지해주세요.”

베트남 들어올 때, 60킬로 육박하는 짐에 테라핀과 테라핀 사용 기계까지 사들고 왔다. 이곳에도 파는 줄 알았으면, 아마 그런 짓은 안 했을 텐데. 점점 억척스러운 여자가 되어 가고 있다.


그렇게 쭉 아이 낳고 그냥 그런 삶을 꾸역꾸역 10년 정도 살다 보니 나의 일과는 흐릿한 날씨에, 구름 낀 날씨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우연히 올해 처음 알게 된 브런치. 눈이 휘둥그래 졌다. 신세계다. 유튜브도 찾아보고 인터넷을 뒤져 보니 호불호가 심한 곳이다. 난 블로그도 없다. 인스타도 없다. 소셜미디어 네트 워크는 네이버 , 카카오톡, 왓츠앱이 전부인 나에겐 이렇다 저렇다 할 불평불만도 없다. 브런치는 나의 삶에 큰 목표가 되었고 넘어야만 할 크고 높은 산으로 떡 하니 자리를 잡아 바렸다.


< 스스로 온전한 달이 되기 위해서 >


몸부림이었다. 이대로 50을 향한 나의 모습이 공포 그 자체였다. 무서웠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나의 삶을 사랑하고 동시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지만 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글을 적기 시작했다. 딱 그만큼 내가 노력하는 만큼, 이후 나의 죽음에 그 의미가 부여된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정을 꾸리고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되었다 하여도, 삶은 각자가 알아서 찾아야 한다. 자기 삶을 찾지 못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서로 색이 다른 반쪽과 반쪽이 만나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온전한 두 개의 원이 서로 포개어지는 모양의 부부생활이 더욱 안정적이라고. 둥근 보름달 두 개가 하늘에 나란히 떠 있어 하나가 가끔 회색빛 먹구름에 가려지면 나머지 다른 하나가 환희 빛을 비추어 구름 뒤편 달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듯 자기 인생의 주인은 남편과 자식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난 마흔이 지난 뒤 에야 알게 되었다.  



온전한 두 개의 달이 포개어지는 모습




몇 차례 탈락 끝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올해 나의 도전 목록 중 제일 마지막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자신감을 찾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미술 심리와, 심리분석 자격증을 취득했다. 요즘 무료로 강의를 듣고 쉽게 취득할 수 있는 뭐 그런 자격증이다. 나름 무언가에 몰입할 수 있었고 몇 달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집 꼬맹이가 자격증 시험 보는날, 엄마 축하한다면서 베트남 Tiger 맥주를 건네 주었다. 충격이었다. 그뒤로 아이 앞에서 맥주는 마시지 않는다. 무더운 날씨에 가끔 자기전 탁 쏘는 맥주 한모금은 생활의 활역소 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코로나 덕분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이유이기도 하다.  

 

7월 마지막 주(저번 주). 똥줄 타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수십 번씩 이메일을 한 시간 간격으로 하루 종일 확인하고 기다리고 기다렸다. 브런치에 제출한 글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글이고, 그 글을 읽고 무료로 평가까지 해주는 곳이 유일하게 브런치였다.


즉 다시 말해서 이 곳 베트남에서 내가 믿고 의지 할 수 있는 결과를 알려 주는 곳이 브런치 밖에 없었다. 인정받고 싶었고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토록 간절했다. 더 이상 학교 선생으로 써가 아니라 글 쓰는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꿈이 차지게 야무졌다.


기초 실력을 쌓기 위해 난 무식할 정도로 시간을 투자했다. 난 기회가 필요했다. 블로그와 페이스 북도 있지만, 검증된 전문 가들의 점검이 필요했다. 그것이 나의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우선 그들은 나의 글을 읽어준다. 그리고 공짜로 평가도 해준다. 물론 탈락했을 때의 속상함도 있지만, 그것을 계기로 한층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브런치 심사위원 분들을 믿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의 글을 들이밀었다. 결국에는 해냈다. 그분들의 노고와 수고에 깊이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쓸기회가 주어 졌다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있다는 뜻이다. 쓸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가. 당신이 쓴 글에 다른 사람은 그다지 관심 없다. 자료 열심히 찾고 시간을 들이면 된다. 최선을 다해 쓰고 남에게 보여주면 된다.

강원국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다.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은 자격이 주어 졌다는 뜻이고 난 지금 진심으로 감사하다.



저녁 노을 빛 / 호치민


< 브런치 작가의 무게감>


첫 글을 올리고 느닷없이 울리는 ‘라이킷’ 메시지 알람을 받았다. 앗, 신기했다. 블로그 기능과 비슷한 기능이었다. 블로그에서는 영혼 없는 하트를 많이들 누르고 간다. 그런데, 브런치에선 댓글이 달린다. 진심으로... 소통이 되는 장소인 것 같다. 글을 좋아하는 비슷한 사람들과의 온라인 소통이 이루어 지는 곳이다.


‘라이킷’이라는 메시지를 따라 다른 작가들의 글을 열어 보았다.  

세상에. 이곳은 다른 공간이다. 무지개 뒤편인 곳이다. 블로그와도 다르다. 인스타그램과는 더욱 다르다.

 

묵직하다. 무게가 있다. 글 쓰는 실력들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훌륭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 브런치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즐기며 집중하고 있다는 현실에 말 그대로 두 눈이 휘둥그레 졌다.


견고하면서 경건하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숙연해진다.


어깨가 무거워지면서 글 쓰는 사람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깊게 생각하게 된다.

설레고 가벼웠던 마음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 저절로 마음 한편에 점령한다.


숙련된 글보단 역시 진실을 동반한 글들이 눈에 띈다. 신기하다. 글이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싣고 있다.

글이라는 게 그래서 곧 ‘나’ 자신이구나. 소리 없이 마음이 욱신거려온다. 나의 글은 어떤 글일까. 난 지금 어떤 모습일까.


정말 어떤 분들은 나의 글을 읽고 댓글도 달아 주신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소개팅하는 젊은 날의 첫 날처럼 부끄럽기도 하고 수줍다.   


교민사회가 워낙 시끄럽다 보니, 최대한 노출을 꺼려하면서 살았다.

지금 한국에서는 퍼스널 브랜딩이니, 언택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서 유튜브나 인스타 그램을 통해 자기 자신들을 표현하기 바쁘다. 한 층 더 나아가 이젠 곧 평판의 시대가 온다고도 한다.  


그와 정 반대의 삶을 이곳 호치민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마치 곰이 겨울잠을 자듯 그렇게 긴 잠을 10년 동안 자고 있었다. 10년이면 충분했다. 아이도 이제 부모의 도움보단, 옆에 있어 주고 믿어주면 되는 나이로 단단해지고 여물어 져 가고 있다. ‘옆에 있어 주기’ 어느 누구보다 자신 있다. 10년을 했는데 그것 하나 못하리. 메이드도 없이 해냈기에 자신 있다.  


동굴에서 나오자니 눈이 너무나 부시다.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글을 적는 내내 무척 즐거웠다. 마치 단순한 아이가 달콤한 커피 사탕을 엄마 몰래먹는 그런 기분~그냥 좋다.


브런치 바운더리 안에서 무지개 빛깔을 가진 곱고 따뜻한 글, 때론 열정적인 글을 소신껏 담아보려 한다.


천천히

진실되게

나의 속도에 맞추어

뚜벅 뚜벅

그냥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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