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조죠의 일기

by 조죠의 그림일기

5월이 됐다. 자발적 백수생활이 벌써 8개월을 꽉 채웠다.

최소한 1년은 돈에 쫓기지 않고 오롯이 내 시간을 갖자고 굳은 결심을 하고 그만둔 회사였다. 1년 치 미리 계획해둔 저축에 야금야금 손대고, 기존 거래처에서 들어오는 외주 일을 종종 받으면서 한가롭게 지냈더니 8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송별회 때 동료들에게 선물 받은 'Dobby is free' 티셔츠는 지금도 편하게 잘 입고 있다. 그 티셔츠를 받고 기뻐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던 대표님의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진정한 자유의 집 요정으로 산 것은 꽉 찬 8개월은 아니었다. 퇴사한 바로 그날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입원을 하셨고, 그날 퇴근길에 응급실로 달려가서 한동안은 엄마와 함께 간병인의 신분으로 지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함께 즐겁게 지낼 생각에 가득 찼던 퇴사였지만, 병상에서 혼자 외롭게 고통받는 할아버지를 보며 4개월 내내 마음 아팠다. 코로나 때문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은 집에 모시게 되었는데, 엄마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할아버지는 2주 정도 집에 계시다가 연말에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당연히 그 기간 동안 퇴사자의 자유로움 같은 걸 느낄 여유는 없었다. 그저 엄마와 할아버지를 도울 시간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할 뿐.


새해를 맞고, 상을 치르고, 엄마와 천천히 집을 정리했다. 최근 몇 년간 미뤄둔 집안일을 조금씩 하고 매 끼니마다 요리를 해 먹었다. 2월부터는 따뜻해진 날씨에 마음에도 조금 여유가 생겨 운동을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외출 다운 외출은 잘 하지 못한 엄마를 데리고 안 가본 곳을 조금씩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동네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매일 해가 떠있는 동안 두 시간 정도씩은 밖을 걸었다. 도서관도 다녀오고 바닷가를 따라 새로 생긴 산책길을 걸으며 계절이 바뀌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책을 원 없이 읽고, 몸이 아프면 걱정 없이 누워서 며칠씩 사치스럽게 앓았다. 매일 엄마와 걸어서 장을 보러 다녔더니 신선한 제철 채소를 세일 가격에 잔뜩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언니가 사는 서울집에도 함께 다녀왔는데, 이게 2018년 이후로 엄마랑 같이 다녀온 첫 외박이었다. 요즘은 소파에 앉아서 베란다에 들어찬 햇빛을 보면서 차를 마시고 음악도 듣는다. 흐린 날의 저녁에는 욕조에 물을 받아서 목욕을 하며 라디오를 챙겨 듣는다.


2월부터 지금까지 ‘진짜 자유인'의 신분을 만끽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역시 건강이다. 매 끼니 살뜰히 챙겨 먹고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운동을 했다. 몸도 마음도 정말 많이 좋아졌다. 맥주회사를 다니면서 15킬로 정도 쪘다고 생각했는데 퇴사하고 정확히 찾아봤더니, 실제로는 20킬로 정도가 쪄있었다. 세상에, 건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긴 하지만 2월부터 오늘까지 확인해 보니, 벌써 8킬로 정도를 감량했다. 생에 처음 다이어트라는 것이 먹히고 있는 느낌이다. 기쁘다.


내 지금 목표는 '달리는 몸'이 되는 것이다. 매일 가는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마라토너 아저씨가 있는데, 정말 정말 멋지다. 맨몸으로 '기가 막히게 예쁜' 러닝복을 갖춰 입고 엄청난 속도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10킬로 정도 왕복하는 줄 알았더니 얼마 전에 도서관 앞 아파트 단지에서 출발하는 걸 목격했다. 매일 20km 하프 마라톤을 하시는 분인 거다. 개 멋있다. '말 근육'이라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내 체력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지난 몇년간 체중이 급격하게 불었다 보니, 무릎이나 관절이 별로 좋지 않다. 뼈에 부담이 가지 않을 때까지 체중을 감량하고 나면 꼭 나도 달리기를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나도 저렇게 멋있는 아저씨가 되...응?


정말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날 땐 엄마랑 보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나눈다. 불안하거나 충만한 감정이 들 땐 노트를 펴고 일기를 쓴다.(온라인으로 옮겨왔지만) 덮어놓고 돈만 벌다가 자신감을 잃어 더 힘들어진 그림 연습도 꾸역꾸역 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느긋하고 태평한 나도 가끔씩 외부의 자극(ㅋ)이 있는 날엔, 더 조급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혼자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4월이 끝나버린 어제도 마음이 좀 그랬다. 하지만 퇴사 후 첫 4개월은 엄마와 할아버지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다음 4개월이 마음껏 휴식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면, 5월이 시작된 지금을 또 새로운 기회의 시간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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