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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191001 나의 일상

by Jay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위해선 내부적으로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좋은 평가라는 것을 따내기 위해서는 윗 분들의 눈에 들기 위한 액션이 필요하다.


조금 억울하고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잘 따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듯한 의지. 보여주기 식 열정. 적당한 쇼맨십. 그렇다. 쇼맨십이 필요하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진짜 내가 되어선 안된다. 남들이 바라는 내가 되어야 한다. 특히, 나보다 높은 위치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그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는 내가 되어야 한다.





페르소나(Persona)


그리스 어원으로 '가면'을 나타내는 말.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비정규직으로 회사생활을 한 지 1년 3개월이 지났다. 그동안은 그래도 나름 잘 버텨온 거 같다. 보수가 적어도. 남들 다 받는 성과급을 못 받아도. 자기 계발비가 없어도. 주어지는 일의 중요도와 부여되는 권한에 확연한 차이가 보여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내 상황을 수용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면 됐다.


"저 좀 예쁘게 봐주세요."


그렇게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다, 퇴근과 함께 가면을 집어던지면 그만이었다. 퇴근 후 자기 전까지 주어지는 하루 2시간의 시간. 그 순간만큼은 내가 원하는 진짜 나의 삶을 위해 쏟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2/24.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런데 요새, 그 시간을 페르소나에 침범받고 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오고, 씻고, 밥을 먹고, 쉬려고 침대에 누워도 사무실 앞에서 벗은 줄 알았던 페르소나가 당최 벗겨지질 않는 것이다.


누구에게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공간에서 조차 타인의 시선을 느낀다. 무엇일까? 왜 나는 아무도 없는 나 혼자 있는 공간에서 조차 타인을 의식하며 위축되고 있는 것일까? 며칠을 고민하다가, 결국엔 그 실체를 알아버렸다. 그날 하루의 잔상. 과거의 내가 결국 범인이었다.


'그때 나는 왜 상사의 질문에 답변을 못한 거지? 오늘도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말았어! 젠장, 조금만 더 꼼꼼했으면 빠트릴 일 없었는데. 선배의 그 말엔 뼈가 있던 거 같은데? 내일 회의 때는 무슨 안건을 내야 하지? 오늘 하루의 나는 왜 이렇게 형편없던 걸까?'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이 너무 필요하다. 업무의 연장선에 있는 회사 밖 시간 말고. 온전히 내 인생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의 개입도, 누구의 평가도, 누구의 상처 주는 말도 껴들 수 없는 나만의 시간.


이게 어디 나만의 문제이겠는가. 페르소나의 연장. 현대인이 겪는 만성 스트레스의 근원이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회사에서의 나(페르소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작별을 고해야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나는 나이고 싶지만, 내가 나일 수 없게 만드는 가면이 삶 전체에 따라붙고 있다.


비정규직이라 겪는 특별한 아픔은 아닐 수 있지만, 그냥 요새 내 삶의 모습을 돌이켜보니 이 부분이 참 씁쓸하다. 만약, 이러한 압박감이 정규직 전환 심사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면, 그까짓 거 그냥 포기해버리고 말지 싶다.


하지만, 이 또한 어디까지나 현재 순간의 감정일 뿐. 내일도 나는 가면 하나 주섬주섬 챙긴 채 출근 지옥철에 몸을 맡길 거다. 당장의 삶은 살아야 되니까. 당장 해야 할 일엔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 지금 이 시기와 감정들이, 결국엔 무엇인가 이루어내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경험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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