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같이 했던 너, 앨저넌
이 책은 로맨틱 소설이 아니다. 앨저넌은 사람이 아니라, 실험용 쥐다. 이것은 높은 지능에 대한 인간의 선망과 그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잃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지능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많이 슬프고도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이 책의 주인공 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난 삼십세 사리고 담 딸이 내 셍일이다.
주인공 찰리는 빵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33세의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그는 지능이 높아지는 것에 대한 갈망이 있어서 뇌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뇌 실험이라 함은 뇌 수술을 통하여 IQ 60대인 그에게 일반인 혹은 그 이상의 지능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험이었다. 물론 이것은 찰리를 위한 뇌 실험은 아니었고, 다른 수많은 인간에 대한 적용을 위한 첫 인간대상으로 찰리가 선택된 것뿐이다. 이 실험 이전에 '앨저넌'이라는 실험용 쥐에게 뇌실험을 했었다. 그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앨저넌은 다른 쥐와 차원이 다른 지능을 가지게 되었다. 찰리는 뇌 수술을 받기 전까지 앨저넌과의 미로게임에서 졌다. 앨저넌은 쥐이지만 찰리의 경쟁상대이기도 했다.
이 책은 찰리의 '경과 보고서' 즉 일기이다. 실험의 효과와 결과를 남기기 위해 쓰는 실험경과지로써 쓰인 이 책은 처음에는 IQ 60대의 지능으로 쓴 글이니만큼 맞춤법에 상당히 어긋난 글자들로 쓰여있다. 그런 찰리가 뇌 수술을 받게 된 후에 그는 놀라운 속도로 천재들의 대열에 끼게 된다. 학습능력은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더 높고 빠른 수준이었고 심지어 그의 지능은 185까지 치솟고 자신을 대상으로 한 뇌 실험에 대해 연구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똑똑하면 행복해질까?
이것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나도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읽게 되었으니까. 인위적으로라도 지능을 높이면, 아이를 억지로라도 끌어다가 학원에 앉히고 알아야 하는 것들을 머릿속에 밀어 넣으면, 그것을 참고 잘 견디면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질까? 우리보다 많이 아는 게 우리보다 행복해지는 조건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 말이다.
난 아프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주먹으로 맞은 것 같기도 하면서,
가슴 앓이도 하는 것 같다.
뇌 수술을 받은 후, 찰리는 가장 처음 분노를 경험한다. 자신을 놀리고 비웃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웃어 보이던 그의 웃음기는 사라졌다. 그는 그동안에 자신이 겪은 일들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분노와 세상 전체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찰리가 지능이 높아진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높아진 찰리의 지능으로 인해 자신의 무능력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서서히 찰리 주위에는 사람들이 없어졌다.
찰리는 모든 과거를 기억하게 되었다. 기억뿐만이 아니라 해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 과거의 기억들을 그를 괴로움에 빠지게 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지능이 낮음으로 인해 엄마에게 버림받을 두려움에 있었고 실제로 버림받은 찰리는 그의 인생 목표를 오직 지능을 높이는 것으로 정했다. 사실 찰리는 지능을 높이고 싶은 게 목적이 아니었다. 찰리가 원한 것은 '사랑'이었다. 엄마의 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같아지는 것. 찰리는 천재가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자신으로 살고 싶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타인들보다 높은 곳이 아니라 타인들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천재가 되어가며 찰리는 분노와 퇴행에 대한 두려움(이것은 앨저넌의 퇴행을 통해 그가 예측한 두려움이다.)에 사로잡히고, 인격의 분열,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감정을 경험한다. 그는 지능 외의 모든 것을 잃었다. 심지어 과거의 자기 자신과도 적이 되어버렸다. 그가 겪은 외로움은 그가 삶에 대한 끈을 놓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찰리는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
자기 세계에 갇혀버리고 불안과 건망증, 신경쇠약 증상으로 괴로운 사람으로. 지능을 높이고자 할 때 놓치게 되는 심리적인 문제라는 함정을 찰리는 경고한다.
이틀 전에 앨저넌이 죽었다.
이 책의 제목
운명을 같이 했던 너,
앨저넌에게 꽃을
에서 볼 수 있듯이, 앨저넌은 이제 단순히 실험용 쥐가 아니었다. 앨저넌은 찰리의 미래였다. 앨저넌을 뒷마당에 묻어준 찰리는 들꽃 한 다발을 그 무덤에 올려놓으며 울었다.
그리고 찰리는 앨저넌처럼 지능 상승의 속도와 같은 속도로 퇴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모든 기억을 잃어가고 점점 더 뒤로 물러갔다. 수많은 두려움까지 짊어지고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끌려들어 갔다.
다음 문장에서 나는 가슴이 쿵!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직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올려놋는다.
'놋'자를 보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뇌 수술 후에 모든 맞춤법이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쓰였던 그의 글에서 발견된 오자. 그렇게 사라진다. 움켜쥐려고 했던 것들이 사라진다.
제발... 제발... 일꼬 쓰는 법을 이저버리지 안캐 해주세요...
이건 지능이 낮은 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무언가를 욕망하고 얻고 또 무언가를 잃는 삶의 모든 과정의 이야기이다. 위로만 위로만 오르다가 내리막에 들어서면, 이젠 멈췄으면 하는 바람으로 꽉 쥔 손의 눈물이다. 우리는 모두 얻는 것보다 잃는 것들이 많을 것이고 커가지 않고 작아질 것이며 기억을 붙잡으려 애쓸 것이다. 사라지는 행복들을 붙잡고 싶어서 기억을 더듬을지도 모르겠다.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는 삶은 정상에 오르고 손 흔들며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내려오는 길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오르더라도 겸손해야 하고 너무 높이 오르는 것에만 온 에너지를 다 쏟아서는 안되는 일이다. 삶 이후를 보는 자는 복되다. 늙어져 내리막길을 내려와야 하는 순간에도 영원을 보는 자는 복되다.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놓아주기를 부탁하는 찰리의 마지막 편지의 추신은 찰리를 세상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내가 한 사람으로 당신 곁에 있었음을,
내가 가치 있는 한 사람이었음을,
내가 살아있는 한 인간이었음을
잊지 마세요.
나.를.잊.지.마.세.요
책 속에서 찰리가 보았던 플라톤의 말이 내 마음에도 남았다.
"동굴 속의 사람들이 그를 두고 말할 것이다.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어쩌면 오르고자 하는 그곳에 사람들이 찾는 그건 없을지도 모른다.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구름 위를 봐버린 애벌레들처럼.
The Well-beloved
앨저넌에게, 그리고 찰리에게 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