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 풍경으로 이야기하다
창밖을 의식적으로 내다보는 일이 많아졌다. 마테오 페리콜리의 책 <창밖 뉴욕>을 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집 창밖 풍경은 복잡하지만 멀리서 보는 풍경이라 집안에서 느끼기에는 꽤나 조용해서 그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집에 오래 머문다해도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 시선을 둔 채 지내게 된다. 집안에서 내가 해야할 것들에 눈이 가고, 내 의지는 나를 움직여 그 일들을 하게 한다. 그러다보면 어떤 날은 창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채 지나기도 한다. 어제와 오늘이 특별히 다를 게 없는 창밖 풍경이라지만, 그래도 한 번도 관심있게 눈길주지 못한 풍경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 날도 있었다. 요 며칠이 그랬다. 여행을 하고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큰 딸이 독감을 진단받았다. 꼼짝없이 자가격리다. 여행 후에 특별히 약속을 많이 잡지도 않았지만, 다행히 미루어도 괜찮은 몇몇 약속들 뿐이어서 괜찮았다. 쉼을 누렸다. 이 쉼은 생활영역의 고립을 동반한 것이고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쉼을 누렸다. 딸은 개학하는 날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내내 볼멘소리를 하고 툭툭 짜증도 부리고 때론 슬픈 감정이 든다고 토로하기도 했지만, 나는 충분히 듣고 이야기 나눈 후에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날이 있고, 나 자신보다 남을 생각해야 하는 때도 있다는 말로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창문은
몽상을 위한 탈출구지만
어떤 창문은
함께 하는 친구다
<창밖 뉴욕>이 뉴욕에 사는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의 스토리를 담았다면, 이 책 <작가의 창>은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 중 '작가'라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들의 글이 실린만큼 글의 완성도가 높고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나에게 영감을 주는 문장도 있었고, 나로 책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내다보게 하는 문장도 있었다. 그들의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으로 나는 그들의 삶을 부분적으로 짐작했다. 그리고 같은 풍경이지만, 그 풍경을 대하는 자세가 다를 수 있음을 그들의 글과 내 감상을 비교하며 읽기도 했다.
풍경 속의 많은 것들은 말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내게 실제적인 음성으로 말을 걸지는 않는다. 창 안쪽에 있는 나는 누군가의 창밖의 풍경 안에 있는 또하나의 풍경이여서 나도 그들 중 누구 하나를 지목하여 말을 걸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창밖 풍경을 보며 나는 나에게 말을 건다. 창밖 풍경을 보며 딸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것은 짧은 독백이 되기도 하고 놀람의 표현이 되기도 하고 깊이 있는 대화의 시작이 되기도 하며, 과거로의 여행이 되기도 한다. 오늘 아침 창밖을 유난히 꼼꼼히 살펴보던 작은 딸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저기 공원에 스케이트장이 생긴 거 알고 계셨어요?" 아니, 나는 몰랐다. 그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뿐이다. 나도 딸 옆에 가서 그곳을 집중하여 바라본다. 멀리 보이지만 분명히 하얀 빙판이 있었다. 거기에는 여기서는 들을 수는 없지만 분명히 수많은 소리가 나고 있었다. 얼음판을 지치는 소리,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는 쿵 소리, 손을 잡아달라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 바람을 가르는 즐거움의 미소들이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우리집 풍경이 참 좋다.
2주간의 남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 기간 동안 창문을 통해 종종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호텔과 아파트에서 보이는 풍경은 아침마다 내가 다른 곳에 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 창밖 풍경이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질 즈음, 우리는 또 다른 창밖 풍경이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마테오 페리콜리의 책을 읽은 후에는 창밖 풍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창의 틀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마치 미술관에서 멋진 작품 앞에서 마지막으로 그 액자틀을 눈으로 훑어내려가는 것처럼. 창의 틀은 그 집의 창밖 풍경을 완성한다. 이 책 속의 창밖 풍경이 평범하지 않은 작품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마테오 테리콜리가 그려넣은 그 창의 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 창밖의 풍경의 세계 속에서 나는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곳을 느리게 혹은 빠르게 걸어서 지나기도 하고, 차를 타고 나가기도 했으며, 장을 보기도 했고,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생각하며 선물을 사기도 했다. 차를 마시기도 하고 배고프다며 어떤 곳에서 식사를 할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 풍경속에서의 나는 현실을 살았다. 그곳에서 나는 내가 서 있는 그 공간을 사색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나는 마음이 평온해지고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머물던 그 모든 장소들은 나에게 조금 떨어진 먼 공간들이 되어 내가 관람할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해준다. 그 거리감에서 나는 안전함을 느낀다. 심지어 유리로 차단되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이 창은 내가 원하면 열수도, 또 닫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면 나는 그 공간을 향해 다리를 놓아 건너가고, 그저 바라보기만 원하면 창을 닫고 마치 그쪽에서 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혼자 바라봄의 시간을 누리고, 그마저도 싫으면 창에서 시선을 떼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창밖을 바라본다. 오늘은 하늘이 회색빛을 띤 엷은 구름으로 덮여있다. 살짝 무겁지만 온화한 하늘색이다. 빛은 점점 투명한 노란빛으로 창밖의 오래된 아파트의 누런-처음에는 분명히 하얬을- 측면을 물들인다. 움직이는 것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가만히 있게 만들어진 것들은 잠잠히 그 자리를 지킨다. 이 시간 나는 움직이는 것보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멈춘다. 그것들은 이미 빛을 받아 충만해졌다. 해가 진다.
The Well-beloved
자가격리 마지막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