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을 읽다

고도를 기다리며_사뮈엘 베케트

기다림의 희망과 절망에 대하여

by Jianna Kwon

1953년 초연된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
나무 한 그루와 두 사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또 다른 두 사람 포조와 럭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소년 하나.

기다림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 책장에서 이 책을 뽑아 들었다. 그 대상도, 만남의 장소와 약속된 시간도 모르는 기다림이 가능한가에 대해 누군가 질문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선명하게 가능하다고 나는 대답할 수 있다.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는 이 기다림은 확신에 찬-혹은 신앙이라 해도 될법한- 것이다. 고도가 언제 올지, 고도가 어떠한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없고 약속 장소가 그곳인지에 대해서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들은 그 기다림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기다리면 온다는 확신이 아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기다림'이라는 확신이다.

기다리는 사람 vs. 기다리지 않는 사람


기다리는 두 사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하루와 기다리지 않는 사람 포조와 럭키의 하루는 매우 대조적이다. 기다리는 두 사람은 좀 따분해 보이는 시간을 보낼지 몰라도 그들에게 적대감이나 절망감보다 오히려 경쾌함과 희망을 느낀다.(상대적으로 말이다.) 포조와 럭키를 보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세상에 대한 침묵으로 모두 반사회적인 태도를 취하는 강렬함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뜨겁다. 하지만 그것은 빨간 열정의 뜨거움이 아니라, 시커먼 경멸의 뜨거움이다. 사회의 부조리를 여실히 보여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프고도 깊은 응어리 같은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두 사람이다. 기다리는 사람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도-혹은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며 산다. 다만 그들은 다른 인생을 살 뿐이다. 같은 공간에서 말을 섞지만 현저하게 분리된 인생들이 나무 아래에 있다.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의 눈물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럭키의 비극은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더 도드라져 보이고, 무언가를 쥐어야만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자의 슬픈 자아상을 보게 해준다. 왜 짐을 내려놓지 않을까. 포조는 말한다. 그에게 그럴 권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런 욕구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다만 럭키는 포조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그것을 선택했다고.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버. 림. 받. 지. 안. 기. 위. 해. 서. 베스트셀러가 된 아들러의 심리학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눈밖에 나고 누군가의 마음에서 <DEL> 버튼으로 눌려 버림받지 않기 원한다. 누군가의 눈에 들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려는 욕망보다 누군가에게서 버림받지 않기를 원하는 욕구는 훨씬 원초적인 것이다. 인간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수반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도 버린 사람이 없어도 느끼곤 하는 이 감정은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아담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생겼던 것일까? 사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어도, 인간의 마음엔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럭키가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짐을 내려놓는 방법을 몰라서도 아니고, 그럴 권리가 없기 때문도 아니었다. 짐을 내려놓으면 버림받을지 모를 거라는 자기만의 세계 속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현대인들이 쉼없이 위로 오르려고 하고, 수많은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어깨에 진 채 걸어가는 것도 이런 두려움 때문일까.


망각의 시대, 반복되는 일상


잊는다. 잊어버린다. 이미 잊어버렸다. 블라디미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어제 일도 잊는다. 기억하는 자만이 경험하게 되는 비참함과 절망이 블라디미르에게 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하는 어제의 일, 이전의 역사를 타인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들을 연결하여 어떤 다른 결론을 내리고 싶은데, 아무도 동조하지 않는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하루를 산다.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일, 그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 이것은 희망이라기보다 절망과 대면하기 두려운 그들을 위한 유일한 피난처이다. 쳇바퀴 도는 일상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망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고도가 도착하는 일이었기에. 이러한 반복적인 일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둘이 헤어지거나,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거나, 고도가 오거나 세 가지 경우이다. 헤어짐은 고독을 수반하기에 두렵고, 목을 매달아 죽는 일은 극단의 두려움이기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 뿐이다. 결국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시 기다림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대상도, 만남의 장소와 약속된 시간도 모르는 기다림이 가능한가? 그렇다. 목표를 설정한 것처럼 살지만 사실은 그 목표는 허울에 불과한 겉껍데기일 뿐 진정한 삶의 목적 없이 수많은 기다림의 연속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가능하다. 그러나 기다릴 대상이 확실한 사람, 그 대상을 이미 만난 사람, 시간과 장소를 몰라도 그 약속을 믿는 사람, 심지어 기다리는 그 대상이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대해 또한 나 자신에 대해서 써 놓아 남겨놓은 책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모든 인생은 끝이 있다. 막연한 기다림으로 인생을 살 것인지, 불분명해 보이지만 그 무엇보다 확실한 약속을 가진 기다림으로 인생을 살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The Well-beloved
기다림은 그 대상이 확실할 때 그 무엇보다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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