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의 그날을 달리다.

by GoGo자형

땀이 줄줄 흐릅니다. 햇살은 거칠고, 바람은 뜨겁습니다. 8월의 거리 위에 서 있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8월 15일이 지나면 어딘가 공기가 조금은 달라진 듯 느껴지곤 해요. 바닷물도 살짝 차가워지는 것 같고요. 그렇게 한 해의 더위가 서서히 꺾이려 할 즈음, 1945년 8월 15일, 그날도 이런 더운 날이었을까요?

광복의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땀과 눈물을 흘리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까요?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해방.

오늘은 그 기쁨을 기억하며, 광복과 관련된 문화유산을 따라 함께 달려보려 합니다.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에요. 하지만 광화문이 계속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일제는 경복궁을 허물고 광화문 안쪽에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광화문까지도 철거하려고 했지요. 여러 반대 덕분에 광화문은 철거는 면하게 되었지만, 경복궁 동쪽 건춘문 근처로 옮겨지게 되죠.

1952년 한국전쟁 폭격 피해를 입은 광화문(출처:위키백과)

1950년 한국전쟁 때 문루는 다 소실되고 육축만 덩그러니 남았죠. 1968년 다시 복원되었지만,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만들게 됩니다. 그 당시는 콘크리트가 최고의 건축재료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로부터 약 40년 뒤인 2010년 광화문은 제자리에 나무로 복원이 되었고, 콘크리트 광화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도, 서울역사박물관 야외에 콘크리트 광화문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으니 콘크리트 광화문의 일부를 보실 수가 있어요. 그리고 한때 경복궁에 세워져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축 부재는 독립기념관 야외에서 만날 수 있어요.

광화문은 2010년 나무로 제자리에 복원되기까지 수난의 역사를 겪어왔습니다. 자주독립국의 상징이자 우리 문화유산의 자존심을 담은 광화문, 앞으로는 더 이상 이리저리 옮겨지지 않길 바라봅니다.


자주 국가의 상징, 독립문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원래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영은문은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문, 바로 모화관의 정문이었죠. 앞에 보이는 커다란 돌기둥 같은 구조물—바로 영은문의 주초석이에요. 주초석이 엄청 크죠? 이걸 보면 당시 문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 자리에 새로 세운 문이 바로, 독립문입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조선은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주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 상징으로 만들어진 문이 바로 이 독립문이에요.

사실 저도 처음엔, “일제 강점기 이후의 독립을 기념하는 문인가?” 하고 생각했었는데요, 그보다 훨씬 이전의 독립, 즉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것이었더라고요.

독립문 전경(촬영:gogo자형)

이 문은 독립협회를 조직한 서재필의 주도로 건립이 추진되었고,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아 본격적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설계자는 스위스 혹은 러시아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혹시 독립문을 보면서 어디서 본 듯한 느낌, 들지 않으셨나요? 맞아요—바로 파리 개선문이 떠오르죠. 실제로 프랑스 개선문을 참고해서 설계되었다고 해요.

정면을 바라보면, 왼편 안쪽에 위로 올라가는 도 보이는데요, 지금은 잠겨 있어서 들어가 볼 순 없습니다. 전면에는 ‘독립문’이라는 한글, 후면에는 한자로 ‘獨立門’, 그리고 상단엔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독립문 출입구(촬영:gogo자형)

지금의 위치는 원래 자리에서 약 70미터 서북쪽으로 옮겨진 것인데요,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이전된 것이죠. 원래 자리가 도로 한가운데라 지금은 기념 동판만 남아 있다고 해요. 거대한 구조물을 통째로 옮겼다니, 대단한 기술입니다.

자, 이제 유관순 열사 동상을 지나 다음 목적지인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가볼까요?


고통과 저항의 상징,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경(촬영:gogo자형)

1907년, 일본인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감옥입니다. 처음에는 '경성감옥'으로 불렸고, 이후 ‘서대문감옥’, ‘서울형무소’, ‘서울구치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시대의 어두운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왔죠.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수많은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을 거쳐갔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여성 감옥

강우규 의사가 순국한 사형장까지- 모두, 그 치열했던 저항의 시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옥사(촬영:gogo자형)

오늘은 이곳을 지나며 짧은 인사만 건넵니다. 하지만 부디, 언젠가 꼭 직접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이곳에 가득한 붉은 벽돌의 무게를 마주하고 있자니, 붉운 벽돌이 이 땅의 독립을 위해 흘린 피와 눈물처럼 느껴집니다.ㅠ이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한 외국인의 눈과 펜으로 조선의 독립을 세상에 알린 집 딜쿠샤로 향합니다.


기쁜 마음의 궁전, 딜쿠샤(엘버트 테일러 가옥)

독립문에서 사직터널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드디어 진짜 언덕 다운 언덕을 만나게 됩니다. 뛰어오르기 만만치 않은 경사. 숨이 턱까지 차오릅니다. 그런데 왜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왔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아름다운 주택, 서울 앨버트 테일러 가옥, 다른 이름으로는 딜쿠샤(Dilkusha) 때문입니다.

서울 엘버트 테일러 가옥(출처:국가유산청)

딜쿠샤는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와 아내 메리 테일러 부부가 1924년에 지은 서양식 주택입니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현관 옆, 측면의 돌에 이 집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어요.

앨버트 테일러는 1897년,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광산업과 상업에 종사했습니다. 이후 1919년에는 AP통신사 통신원으로 활동하며 고종의 국장, 3·1 운동, 제암리 학살사건 등을 직접 취재해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의 기사는 뉴욕타임스에도 실렸고, 세계는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제의 만행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일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강제 추방을 당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고, 한국으로 다시 오려던 중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1948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딜쿠샤는 테일러 부부가 떠난 뒤 소유주가 바뀌고 방치되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런데 2006년, 그의 아들이 딜쿠샤를 다시 찾으면서 이 집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사실 이 건물과의 인연은 저에게도 특별합니다. 2010년, 저는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근대문화재과에서 담당자로 일하며 딜쿠샤를 처음 조사하러 왔었어요. 그때만 해도 이 건물 내부는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열 명이 넘는 세대가 무허가로 거주하고 있으면서 불법 증축도 있었고, 내부는 정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상상이 안되시죠? 저는 지금 이 모습이 되려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답니다. 그 후 거주민들의 이주를 해결하고, 복원 논의를 거쳐, 2016년부터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복원사업을 시작했고 2021년부터 지금처럼 시민들에게 공개되게 된 거예요.

지금은 내부에 들어가면 원형을 유지한 벽난로, 붉은 벽돌, 원목 구조 등을 직접 볼 수 있고, 테일러 가족이 살았던 당시의 공간 배치도 재현되어 있어요.

숨차게 올라오셨죠? 그래도 이곳에서 보는 풍경과 이야기, 그리고 딜쿠샤에 깃든 진심 어린 연대의 기록이 그 수고를 덜어주었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한양도성 성곽길을 따라, 가볍게 내리막을 달려볼까요?


김구선생의 마지막 흔적, 경교장

“어라? 병원 건물 안에 문화유산이 있다고?” 고개를 갸우뚱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바로 이곳, 강북삼성병원 안쪽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거처였던 경교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교장 전경(출처:국가유산청)
경교장 2층 확대 전경(출처:국가유산청)

경교장은 원래 친일파 최창학이 별장으로 사용하려고 지은 일본식 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그는 이 건물을 김구 선생께 헌납했고, 김구 선생은 이곳을 임시정부의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하며 ‘경교장’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름은 근처에 있던 ‘경교교(京橋橋)’에서 따왔다고 해요.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은 이 건물 2층 서재에서 흉탄에 맞아 서거하십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이 머물렀던 바로 그 공간 2층 두 번째 창, 그곳에는 지금도 총알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그 뒤, 이 건물은 다시 최창학에게 돌아갔고, 잠시 타이완 대사관저, 6·25 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의 거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해요. 이후 삼성재단이 매입해 복원한 뒤, 지금은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가 이 방 안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마지막으로 바라봤을 창밖 풍경은 어땠을지 문득 멈춰 서게 됩니다.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딜쿠샤, 그리고 경교장. 이 길 위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할 고통과 의지,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는 조금 분위기를 바꿔 다음 장소로 내려가볼까요? 정동길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 봅니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정동길은 언제 걸어도 참 기분 좋은 길입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울창한 가로수들, 조용한 분위기 속에 깃든 낭만까지 참 특별한 공간이죠.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낭만적인 정동길의 풍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바로, 중명전(重明殿)입니다.

중명전 전경(출처:궁능유적본부)

중명전은 덕수궁에 속한 전각으로, 원래는 이 자리에 ‘수옥헌’이라는 건물이 있었지만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의 설계로 지금의 중명전이 세워졌습니다.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고종 황제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그때부터 중명전이라 불리게 되었죠.

을사늑약은 잃어버린 국권의 상징입니다. 광복은, 그것을 되찾은 날이죠. 1905년 11월 17일, 바로 이 중명전에서 일본이 조선을 외교권 없는 보호국으로 만드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이후,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해 이 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지만, 이 일로 인해 강제로 퇴위당하게 되죠.

1910년, 한일병합 이후 덕수궁의 영역은 대폭 축소되었고, 중명전은 궁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 뒤로는 사교클럽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바로 옆의 정동극장이 이 건물을 매입해 국가유산청에 기증했고, 옛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되어 지금은 시민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곳 잔디밭에서 야외음악회를 본 적이 있어요. 중명전을 배경으로 펼쳐진 음악회는, 그저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정동의 풍경에서 근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스터선샤인에 제가 잠시 들어와 있는 것처럼요.

중명전 야경(출처:궁능유적본부)

다음 봄, 정동야행이 다시 열리는 그때, 이곳에 다시 와보시길 권해드려요. 그때의 걸음은 오늘보다 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문화유산으로 만나는 광복절

광복절을 맞아 우리는 조금은 특별한 문화유산의 길을 함께 달려보았습니다. 햇살은 뜨겁고, 숨은 차올랐지만 1945년 8월 15일, 그날의 함성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고, 궁궐을 허물고, 우리의 의지를 꺾으려 했던 그 시절. 그 속에서도 누군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그분들의 뜻이 깃든 장소를 두 발로, 가슴으로, 기억하며 달렸습니다. 과거를 잊지 않고 오늘을 살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향해 달리는 하루. 그 시작을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어 참 감사했습니다.

다음 달, 또 다른 문화유산에서 또 함께 뛸 수 있기를 바라며. 런인문화유산, 다음 달에 다시 만나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봄날, 덕수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