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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녹 Aug 03. 2020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 찾기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읽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이반데니소비치의 수용소의 하루』와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썼던 글.

2009년 1월 22일


 


  여느 때와 같이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이한다. 그 아침은 대개 같은 모습이다. 익숙해졌다고 하면 될 것이다.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맞이하던 느즈막한 아침은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다. 5시가 되면 국민체조 음악과 함께 강호동이 나온다는 ‘1박2일’ 모닝콜이 시끄럽게 울려댄다. 그 전날의 정신적인 피로는 여전하다. 수면이 부족하다고 뇌가 지끈거린다. 기어코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어지러움은 계속된다. 간신히 변기에 앉아 반쯤 뜬 눈으로 양치를 한다. 천일염을 넣어 잇몸에 좋다는 치약이  거품을 내며 입안을휘젓고 돌아다닌다. 싸한 느낌에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새벽이라 그런지 물이 차다. 세수를 하고 방으로 돌아온다. 어제 배구를 너무 열심히 했나보다. 손목에 푸르딩딩 오른 멍 자국이 그대로다. 눌러보니 아프다. 체육이 입시에 반영되지는 않지만 내가 모르던 나의 승부욕 탓 이었던가… 승부욕이 아니라 뒤처지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손목으로부터 느껴지는 아스라한 느낌은, 체육시간 내내 뛰어다녔던 내 다리가 후들거림은, 채 다 풀지 못한 어제의 피로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목요일 시간표엔 잠시도 책상에 머리를 누이지 못한다. 국, 영, 수 주요과목이 죄다 포진해 있는 이 날, 가장 느리지만 빠르게 가는 날이다. 10분, 쉬는 시간의 짧은 수면이라도 정신을 맑게 해 줄 수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몰랐다던데, 쉽게 잠들지도 못 할뿐더러 잠든다 해도 편하지 못했다. 깨더라도 멍한 상태가 계속 되었다. 수업시간도, 야자시간도 좀처럼 졸지 못했다.


  쌀쌀한 기운의 새벽 아침. 오른쪽 어깨가 계속 뻐근했다. 팔을 뻗어 근육을 풀어주었다. 하던 대로 영어듣기를 하고 영어 단어를 외운다. 수학 세 문제를 풀어 주는 것은 수학 감을 잡는데 좋단다. 언어도 아침에 몇 문제, 하루 종일 시달릴 뇌를 달구어주는데 이보다 더 완벽한 계획이 있을까. 어느새 시계가 7시를 가리킨다. 머리를 감고 밥을 위속에 구겨 넣은 뒤 집을 나선다. 삼학년 구월 수능 모의고사가 오늘이란다. ‘수시 이차가 이 모의고사로 갈린다며, 수시 모집 인원이 엄청 늘어서 보험처럼 넣어 둬야한다던데…’ 숨이 턱 막힌다. 아직 고삼도 아닌 고이지만, 일년하고 이개월 남았다는 사실이 날 더 조여 오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 시간이고, 기회가 남아있다고 주위에서 소근 댄다. 뒤쳐질까 발버둥을 친다. 뭘 위해서? 모른다. 일단 기회가 있으니 달려보라는 소리다. 후회하기 전에.


  아니 또, 그럼 무슨 후회? 바라는 것도 없는데 어떤 후회를 한단 말인지, 나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 삶에서 특별한 영화를 바라지 않았기에, 큰 꿈을 꾸었던 것도 아니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릴 뿐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쳇바퀴가 굴러가고, 집으로 돌아온다. 나를 반겨주는 부모님이 계신다. 잠시 어리광을 부린다. 하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다. 모의고사가 일주일 남았다. 기출문제를 풀고, 오답노트를 한다. 고심해서 고른 소설책 한 권을 손에 쥔다. 어느새 열두시 반이다. 피로회복에 좋다는 아로마 촛불을 키고 눈부신 형광등 스위치를 누른다. 불빛이 아른거린다.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긴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촛불을 향해 입을 모은다. ‘후~’ 

이렇게 잠들 수 있다니, 오늘은 꽤 행복한 하루였어. 좋았어….

고은옥, 인문계고의 하루였다.      


  솔제니친은 자신의 노동 수용소 생활 경험을 담담하게 써냈다. 하지만 그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쩜 그렇게 쉽게 담담해 질 수 있을까 싶었다. 구년간 반복된 수용소의 일상이 그를 그렇게 만든 걸까. 자유롭게 지내던 수용소 이전의 생활을,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일도 이젠 없다고 그는 툭 내뱉는다. 아픈 몸을 이끌고 변변치 못한 식사를 했지만 그만의 성격 탓에 그는, 그의 건설 현장의 노동 분량을 훨씬 넘게, 그리고 깨끗하고 확실하게 처리한다. 흠잡을 데 없이 차곡차곡 얹어진 벽돌을 보며 보람을 느끼는 그의 모습이 한참은 이상하게 보였다. 그 일을 열심히 해 봤자 어떤 댓가도 없는데 말이다. 


  죄수들은 일을 하기 전 공사장에 모여 불을 피운다. 윗사람들의 노동 지시를 기다리는 동안 불 앞에서 몸을 녹이는 것이다. 그때, 슈호프(이반)가 말한다. 

‘아 이 순간만은 우리의 것이다!… 운이 좋아 난로 옆에라도 앉게 되면, 발싸개라도 풀어서 불을 쬐는 것이다.… 이 순간의 자유로움이란 너무나 행복한 것이다.’ 


감시와 폭력만이 난무하는 곳에서 이십분 간의 휴식이 자유를, 행복을 가져다준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다 식어 버린 양배추 국물도 음미하며 먹으면 천하제일의 맛이 되었다. 이백그람짜리 빵도 천천히 씹고 혀가 그 맛을 느끼도록 기다린다. 충분한 양이 되지 않더라도 먹을 수 있는 빵이라도 있다는 데 감사함을 느낀다. 


  수용소를 얘기하는 그 수많은 비참한 삶들을 보고 나면 마음이 아파왔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인간을… 하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곤 했다.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안네의 일기’에서 나의 동갑내기 안네가 느낀 두려움과 불안이 내게도 생생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보았던 가족이 찢어지는 아픔은 영화를 보던 모두의 가슴을 찡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작품을 보고도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상의 생활 속, 가족 간 믿음이 있었고 다정한 연인과의 애틋한 사랑이 있었고 전적으론 믿을 수 없어도 함께 할 친구가 있었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였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또한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잔인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 빅터 프랭클은 삶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의지라고 했다. 책에서 사람은 어떠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로고 테라피(Logo Therapy, 의미요법)라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그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치료법을 창안했다. 


  안네와 귀도 그리고 귀도의 아들 조슈아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의지가 있었다. 가족이라는 의미로 스스로를 로고 테라피 속에서 지켜낸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 역시 자신의 연구 활동을 계속 해야 했기에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지켜보는 간수는 없다. 영하 3~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 그 누구도 늦장을 부렸다고 콘크리트 건물에 널빤지만 깔린 ‘영창’과 같은 곳에서 나를 재우지는 않는다. 허나 내 삶의 방향은, 내가 선택했지만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십일세기, 보이지 않는 속박이 현대인들과 나를 묶어놓은 것이다. 뒤처지는 것의 불안함, 남보다 못함의 위화감… 그 때문인지 책을 읽는 내내 슈호프의 자리에 내가 있었다. 

  ‘죽음의 수용소’저자 빅터 프랭클와 같이 위대한 연구 계획이 있어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슈호프처럼 고단한 삶의 순간마다 찾아오는 자그마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생활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을 귀리로 만든 죽이지만 담백함과 포만감만큼은 제일인 것이다. 최악 중의 최악이 아니었기에 행운의 사람인 것이다. 수용소의 생활이 심히 비참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잠들기 전 슈호프는 말한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삶의 의미란 그런 것이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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