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곳간을 채우며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 2021 젊은 작가상 작품집

by 쓰는사람전볼

지난봄부터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참 많이 바빴다.

특히나 최근 한 달간은 하루하루 꾸역꾸역 버티는 일상이다가 요 며칠은 바닥을 박박 긁어 모아 보지만 몇 톨 겨우 나오는 텅 빈 쌀독 마냥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채 몇 시간을 앉아 있어도 곤욕스럽다.


글을 쓰는 과정 그 자체가 유기물처럼 느껴진다.

나무가 햇볕을 받아야 광합성을 하고 사람이 밥을 먹어야 에너지를 내는 것처럼

글을 쓰는 데에도 타인의 문장과 영상, 그도 아니면 혼자 하는 시시껄렁한 단상, 엉뚱한 상상이라도 흡수해 줘야 손가락 끝에서 글 줄기가 뽑아져 나오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적극적인(?) 글쓰기 이후 나는 이러한 것들의 투입이 극도로 저조했다.

책, 영화, 드라마를 가까이 하기는커녕 생각조차 깊이 하지 못하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주름진 뇌에 링거를 꽂고 수액을 공급시켜서라도 컨디션을 회복하고 싶은 심정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2021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 문학동네/

첫 번째 실린 작품은 전하영 작가의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였는데 급한 대로 가뭄에 단비가 되어 주었다.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자신도 여성이면서 여성을 두 분류, 선택받는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으로 구분 짓는 권력(여러 의미로의 권력-예컨대 남자, 예술계, 유력인)에 순응하고, 스스로를 후자로 치부하며 산다. 이 선택받지 못한 여성은 선택하는 그 권력의 부조리를 말하기보다 그들의 메커니즘을 무비판적으로 순응한 스스로를 조명등 아래 비춰 본다.

숱한 밤을 지나고 나서야 주인공은 그 권력을 '까짓것, 별것도 아닌 게.' 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소설 속 장 피에르로 불리는 상징적인 인물은 남자인데, 사실 성별이란 것이 능력에 기반한 성과도 아니고, 둘 중 하나 선택하는 홀짝 게임도 아닌, 그저 선천적으로 부여받는 것이므로 '남자'가 두 여자 중 하나를 택하는 '권력'을 가진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두 말할 것도 없는 편견.

그는 까짓것, 단지 남자일 뿐이었다.


장 피에르는 영화 관련 강의를 하는 교수인데 낡은 명품 코트 하나로 계절을 나는 비주류 예술가였다.

소설 속 주변 인물들은 그에게서 풍기는 우울함을 낭만으로 받아들이고, 어린 제자 그것도 한 번에 수명을, 수년간 지속적으로 만나는 장 피에르의 여성편력을 예술가가 뮤즈를 찾아 헤매는 목마름으로 받아들인다.

까짓것, 별것 아닌 방탕한 예술가인데 말이다.


장 피에르는 유력한 집안의 아들이고, 감옥 대신 프랑스 유학을 했다. 유력한 집안의 망나니 아들, 집안에서 내놓은 자식인데 그런 그를 유력하다고 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든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까짓것, 별것도 아닌 게.


하지만 그는 그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오랫동안 만든 그 울타리 안에서 머물며, 또 다른 별것도 아닌 사람들이 별것인 것 마냥 행세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사람이 된다. 그가 성공한 중년의 예술인으로 칭송받게 된 것. 여전한 여성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두 명의 자식을 둔 대한민국 스탠다드 4인 가족은 여전히 단단하며, 가끔 요란스럽게 인터넷 상에서 그의 사생활이 폭로되지만 이는 아무 힘이 없다.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게 별것인 마냥 활개 칠 수 있는 것은 어쩜 주인공 '나'와 같은 사람들 탓인지도 모른다.

비판 없는 순응, 자각하지 않는 무지, 반성하지 않는 변명.


소설에서 좋았던 점은 선택하는 남자 장 피에르와, 선택받는 여자 연수를 비판하기보다 선택받지 못한 여자 '나'라는 인물이 주인공이며 '나'의 태도를 스스로 돌아보고 개선된다는 것이다.

나는 최근의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이대여와 이대남의 싸움에 귀가 다 아프고

그 옆에서 징과 꽹과리 쳐대며 싸움을 응원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흑심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문장은 꽤나 긴 편인데도 중간에 걸리는 부분 없이 술술 부드럽게 읽혔고

주제도 자칫 거북하거나 선입견을 가지고 읽힐 수 있는 것임에도 작가의 작의가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다 읽은 후 벌써 이야기가 끝나버렸다는 아쉬움을 들게 할 만큼 재미있었다.

이런 소설을 쓴 작가가 너무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


그의 글을 보며, 어릴 적에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르던 싸구려 목걸이가 생각난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색색깔의 구슬 목걸이.

어른들의 눈엔 조잡한 쓰레기 같아 보이는 그 목걸이가 나는 너무 영롱하고 예뻤다.

목줄이 끊어져 방바닥에 떨어진 구슬들을 죄다 모아뒀더니 마치 누군가의 영혼 같기도 하고,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도구 같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읽는다는 것이 시간낭비 같은 문학 소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단어 하나하나가 내가 그리도 아꼈던 오색 구슬 같아 천천히 아껴가며 읽었다.

쓸모없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을 갖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그나마 오늘 하루 지어먹을 만큼의 쌀이 내 곳간에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소설 끝 페이지에 있는 작가의 사진, 그 뒤에 있는 평론가의 사진, 또 다른 작가의 사진, 또 다른 평론가의 사진들도 내게 작은 자극이 되었다.

젊디 젊은 작가들과 평론가들이었다.

내가 취업을 하겠다, 돈을 벌겠다, 발발 대며 사는 동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썼을 사람들.

내 또래의 그들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속 인물들을 만들고, 인물의 가치관을 바로잡아주는 창조주가 되어있었다.

늦었지만 나도 부지런히 읽고 흡수해서 나의 오색 구슬을 만들어야지.

그리고 그 구슬을 꿰어 나의 목걸이를 만들야지. 꼭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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