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것들
어제는 2021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누군가는 그동안의 성과를 자축하며 새로운 한 해를 향한 야심 찬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을 그 시간,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책을 열심히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마음이 좋지 않을 때마다 책을 집어 든다.
활자를 읽으며 느끼는 안정감,
무언가를 내 안에 채워 넣는다는 풍요로움,
무엇보다 글을 읽으며 생각할 때 느끼는 생생한 존재감.
좋은 책을 읽을 때 느끼는 이런 느낌들이 좋다.
특히 오늘같이 내상이건 외상이건 마음이 좋지 않을 때 좋은 책이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한바탕 불길이 치솟고, 파도가 휩쓸고 간 마음의 땅에 활자들이 들어와 괭이질하고 거름을 준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속에 들어와 성실한 일꾼처럼 조용히 마음을 정비한 후 망각의 세계로 스르르 빠져나가는 수많은 활자들.
모든 단어와 문장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책 속의 정수 같은 글 몇 개는 남아 내 마음에 꽃씨로 묻혀있다.
그 덕분에 나는 또 꽃을 피우려 애쓰며 살아간다.
어제 읽은 책은 극작가들에게 성경과 같은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Story)'였다.
이 책은 늘 갈망하던 인생의 스승 같은 책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 되었다.
외골수 교수의 명강의 같기도 하고 방망이 깎는 노인의 그 방망이 같기도 한 이 책은 시나리오 작법에 관한 것이지만 저자는 이런 기술적 가르침에 들어가기 앞서 이야기(story)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길게 서술하고 있다.
나는 이 부분을 곱씹어 읽으며 글을 쓴다는 것과 글을 쓰는 사람, 즉 작가라는 업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저자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풍성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한 어투로 말한다.
이야기에 대한 사랑, 극적인 것에 대한 사랑, 진실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감각에 대한 사랑, 꿈에 대한 사랑, 유머에 대한 사랑, 언어에 대한 사랑, 이중성에 대한 사랑, 완전함에 대한 사랑, 독창성에 대한 사랑,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쓰는 행위에 대한 사랑.
옮겨 적으면서도 입이 떡 벌어지는 이 모든 사랑을 작가는 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작가가 있을까 싶으면서도 저자가 단호하게 요구하는 수많은 사랑에 관한 작가의 자질이 나는 너무 좋았다.
저들 중 내가 가진 사랑이 몇 개나 될까, 거울에 전신을 비춰보듯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매를 맞는데 화가 나긴커녕 희열을 느끼는 마조이스트처럼 나는 반성과 함께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름을 느낀다.
이 정도는 되어야 꿈이지.
그래야 내가 미성숙한 드리머(dreamer)로 남지.
그래야 내가 늘 청춘이지.
#지난여름에 쓴 에세이 '꿈을 이기는 방법'에서 나는 꿈은 마약 같은 성질을 가졌는데, 그것은 꿈이 꿈꾸는 사람을 미완성의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며 이 미완성은 성취의 결핍이라는 점에서 청춘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고 썼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마치 신앙고백이라도 하듯, '그래. 나는 쓰는 일을 사랑한다.' 자인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이런 것들임을.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는 것임을.
지난 두 번의 연애가 떠오른다.
한 연애는 꽤 오래 꽤 깊이 지속되었으나
그 시간 동안 나는 상대의 손을 잡고 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고
다른 한 연애는 매우 짧고 위태로웠으나
그 순간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강렬하게 느꼈었다.
둘 다 나름의 의미를 갖는 사랑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음을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자질에 대해 피 토하듯 연설하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사랑이란 건 아무한테나, 아무것에나 이름 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것, 그것이 사랑의 증거이며 그 마음을 갖게 하는 대상만이 진짜 내가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것이 이토록 무겁고 아름다운 것이라면.
이토록 수많은 사랑을 품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글 쓰는 것을 사랑한다 말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