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만든 이 길을 따라 사랑은 표현된다.
얼마 전 박찬욱 감독, 박해일·탕웨이 배우 주연의 ‘헤어질 결심’을 봤다.
기대만큼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두 시간의 이 영화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최소 이틀은 영화의 숨은 의미를 곱씹어 보게 했다.
누군가는 믿음을 갈망하는 여자 서래(탕웨이)와 믿지 못하는 남자 해준(박해일)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안개 낀 도시로 떠나는 방법으로 이별하는 남자와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이별하는 여자를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게 한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돌려 들었다는 여자와 자신은 한 번도 사랑해라고 말한 적 없다고 소리치는 남자를 기억한다.
‘사랑해’라는 세 글자는 남자의 입에서 결코 나온 적이 없지만, 남자는 여자의 서툰 한국말을 따라 하고 여자에게 맛있는 초밥을 사주고, 여자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을 고민하다 어설픈 고향 음식을 해서 먹였다.
그 모든 순간은 숱하게 많은 사랑해가 존재했다. 단지 음소거되어 귓가에 들리지 않았을 뿐 우리는 모두 안다. 그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남자에게 ‘사랑해’라는 말 그 자체가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길래 충만한 마음에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법도 한 그 말을 나는 결코 내뱉지 않으리 다짐한 사람처럼, 마치 이 사랑의 전쟁에 마지노선이라도 그어놓고 그 선을 지킨 것이 무척이나 의기양양한 사람처럼 자신은 사랑해라고 말한 적 없다고 비겁하게 소리치는 것일까.
흔히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고 한다.
재채기는 현상이고 사랑은 본질이다.
그렇기에 이 말을 두 개의 본질을 열거하여 ‘코의 점막 자극(재채기의 본질)과 사랑은 숨길 수가 없다’ 라거나 혹은 두 개의 현상을 나열하여 ‘재채기와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사랑의 현상)은 숨길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더 정확할 것이다.
사실 꼬장꼬장하게 어휘와 문법을 따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지 재채기가 코의 자극의 현상이라면 사랑의 현상은 과연 무엇이길래 숨길 수 없고, 바꿔 말하면 어떤 현상을 보고 그 본질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일까.
탕웨이와 나는 무슨 근거로 박해일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랑은 숨길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하게 묻어난다. 눈길과 손길과 말길에.
사랑하는 대상을 보는 눈길은 깊이가 있다.
연인을 향한 벅찬 행복이 담긴 눈빛일 수도, 짝사랑하는 이를 보는 애잔하고 쓸쓸한 눈빛일 수도 있지만 모두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다.
잠시도, 허투루 상대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손짓, 버릇 하나하나까지 모두 두 눈에 담아두고 싶어 하는 마음. 그 마음이 눈길에 묻어난다.
손길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공원에서 가만히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 동쪽의 해가 어느새 서쪽으로 뉘엿뉘엿 진다. 연인은 마치 그 상대의 지문을 내 안에 새겨 넣으려는 듯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서로의 손을 매만진다.
우산을 씌워주는 손길, 어깨에 뭍은 먼지를 털어주는 손길,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아주는 손길..
사랑하는 사람의 감성적인 손은 이성적인 좌뇌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상대를 향해 나아간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손길은 결코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말길.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험하고 사나운 말은 모두 체로 걸러내고 세상 예쁜 말들만을 모아 입술에 올려 후-하고 상대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러한 말길은 가식이 아니다. 가슴에 사랑이 있으면 진정으로 아름다운 말들이 입 밖으로 길을 낸다.
‘예쁘다’, ‘멋있다.’ 감각에서 비롯된 감탄사에서부터 ‘행복해’라는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감정의 단어. 그리고 그 모든 말을 아우르는 ‘사랑해’라는 세 글자.
‘사랑해’는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예쁘다, 멋있다, 행복하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사랑해라는 말은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만, 즉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주체적인 말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특권, 사랑을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돌려 말하면 누군가의 눈길, 손길, 말길을 보면 그가 지금 사랑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재채기를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과 손길과 말길은 숨겨지지 않는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눈길과 손길과 말길에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멜로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두 남녀가 키스를 하고 결혼을 하더라도 그것은 휴먼 드라마 정도는 될 수 있을 뿐 결코 멜로나 로맨스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눈길과 손길과 말길, 사랑이 만든 그 길을 따라 사랑이 표현된다.
눈길과 손길과 말길로 사랑은 결코 숨겨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