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재활용

실패한 사랑은 다른 용도로 쓰이기도 한다.

by 쓰는사람전볼

어떤 관계는 그 즉시 목적을 충족시켜 주지만 가끔은 애당초의 목적에 부합하지 못해 폐기되는 관계도 있다. 버려진 인연, 떠나간 사람과의 관계 따위들.


하지만 폐기된 연인과의 경험이 꼭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란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사랑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완수하지 못해 버려진 관계라도 다른 용도로 쓰여 재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우리 만남의 의미이며,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쓰레기통에 처박아둔 그 관계가 곱씹어질 때 비로소 ‘뭐야, 이러려고 그를 만났던 거였어?’하며 피식, 혹은 씁쓸한 웃음이 나는 인연.

며칠 전, 그렇게 나는 몇 달 전 폐기했던 옛 연인이

본연의 목적은 아니지만, 나에게 꼭 필요한 다른 쓸모가 있었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스르르 찾아온 가을은 사람을 조급하게만 한다.

짧은 가을은 한 방울 한 방울 진하게 농축된 과즙 진액처럼 하루하루가 아깝다.

며칠 전 나는 이리도 좋은 가을이 속절없이 떠나가는 것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고 너무 가고 싶었던 가을 캠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얼마 전 친구에게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만 캠핑은 같이 갈 사람 없어 못 간다고 말했었는데, 불현듯 ‘못할게 뭐람. 날이 이렇게 좋은데!’하고 용기가 샘솟았다.

처음 혼자 가는 캠핑이라 가까운 곳을 뒤지기 시작했고 운 좋게도 상암에 있는 노을캠핑장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비 소식이 있는 한글날 연휴지만 다행히 내가 예약한 날짜에는 날씨도 화창했다.

망설일 게 없었다.

그렇게 나는 첫 솔캠을 단행했다.


#8년의 남자


나의 첫 캠핑은 8년을 만난 남자 와였다.

텐트 안에서 바라보는 아침 해, 바깥에서 불어오는 코끝 시린 아침 공기, 물기 촉촉 머금은 아침의 잔디와 나뭇잎들.

그 순간, 그 공간 안에 내가 있단 찡한 감동.

그는 내게 이런 경험을 선물했고, 나는 캠핑이 푹 빠져 그 해 초겨울까지 매 주말이면 어디로 떠날까 고민하며 전국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었다.

그와는 이별했지만, 잊히지 않는 캠핑의 기분.

그 경험이 가뜩이나 겁 많은 나에게 솔캠에 도전할 용기를 샘솟게 한 것이다.


1박 2일간의 솔캠 동안 과거 그와 함께 캠핑했던 경험은 꽤 유용했다.

특히 불멍을 위한 장작불 지피는 일과 철수를 위해 텐트를 접을 때, 나는 기억을 되살려 그가 했던 동작을 따라 했다.

의외로 초보 캠핑러들은 장작에 불을 지피는 것을 예상보다 어려워한다. 하지만 나는 무려 ‘처음’ 이지만, 그가 했던 대로 종이컵에 식용유 묻힌 휴지를 넣고 잘 포개진 장작 사이에 종이컵을 집어넣었다. 그 후 토치로 종이컵을 태우며 장작에 불이 붙기를 기다렸다.

예상대로 성공이었다.


다음날 텐트를 철수할 때도 마찬가지.

텐트 바닥과 방수포까지 수건으로 닦으며 물기를 제거하던 그를 떠올리며 나도 그렇게 했다.

커다란 텐트를 혼자 접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자로 잰 듯 각을 맞춰 접어야 부피가 줄어든다며 잔소리하던 그를 떠올리며 텐트 네 귀퉁이를 딱 맞춰 접기 시작했다. 다 접힌 텐트가 가방 안에 쏙 들어가자, ‘야호!’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와 함께했던 8년이 그저 시간낭비만은 아니었다.

나의 경험의 폭을 넓혀준 사람. 그 덕에 나는 솔로 캠핑도 할 줄 아는 여자가 되었다.


# 6개월의 남자


야무지게 삼겹살을 구워 먹고 맥주도 마셨다.

텐트 안에서 몽롱한 기분으로 음악을 듣는데 6개월의 남자가 떠올랐다.

사랑이 싹트기엔 짧고 이별이 아무렇지도 않기엔 긴 시간 6개월.

나는 8년 만난 남자와 헤어진 후 6개월 만난 이 남자를 최악의 남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문제를 파고드는 법이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다 타버린 재 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나는 알지 못하는 그의 청춘, 한때는 그에게도 있었을 열정의 온도는 이미 사라지고 나는 그저 다 타고 남은 잿더미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내게 한 번도 뜨겁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장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와 함께한 경험도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다.

사실 이번 솔캠 장소인 노을캠핑장은 6개월의 남자와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퇴근 후 느지막이 하는 캠핑이지만 하나도 두렵거나 걱정되지 않았던 것은 그와 함께 이곳에 와 봤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6개월의 남자와 함께 이곳을 경험해 봤기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맹꽁이 열차를 타고 캠핑장까지 올라와야 한다는 것과 화로와 테이블은 구비되어 있어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이곳의 인적 드문 산책길과 노을이 예쁜 스팟도 6개월의 남자와 함께 와 본 경험 때문에 알고 있는 지식이었다.


나아가 그는 어쩌면 나에게 매우 쓸모 있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8년의 연애를 끝마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미처 몰랐지만 긴 항해를 마치고 수년만에 발을 땅에 디딘 선원처럼 땅 멀미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렇지 않다 생각하지만, 육지 사람들이 보기엔 휘청하고 있었을 지도.

그때 나에겐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적응의 시간’과 ‘적응의 관계’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나의 생각과 습관이 매우 많이 8년의 남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를 지우기 위한 이염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시기에 나는 6개월의 남자를 만났다.

나는 사랑이라는 목표를 위해 그를 만났지만, 결과적으로 그와의 관계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의 인생에 있어 그의 존재는 다른 임무를 맡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랜 항해 끝 땅 멀미를 진정시켜줄 안정제,

지독한 연애를 마친 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의 완충제,

사랑과 사랑 사이의 브릿지.

6개월의 남자가 아니었더라도 그 누군가는 해 주었어야만 할 역할이었고, 나는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났어도 그 사람을 6개월의 남자로 만들어버렸을 것 같다.


맛있는 빵을 만들려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산 밀가루가 결국 베이킹은 실패했지만 기름기 닦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것처럼 마음속 쓰레기통 가장 깊숙한 곳에 꾹꾹 밟아 버린 그와의 관계가 다른 용도로 유용하게 사용되었음을 깨달았다.

망쳐버린 관계도 그 시절 나에게 필요한 인연이었다면 더는 6개월의 남자를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와의 관계가 다른 쓰임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그가 그 역할을 해 주고 간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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