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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 진정한 삶이란

vs 조르바와도 비교해보자.

by Y One

톨스토이의 책을 처음으로 완독했다. 러시아 소설은 언제나 방대한 분량과 복잡한 인명 때문에 부담스러웠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짧은 분량과 단순한 등장인물 덕분에 오히려 쉽게 읽혔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에게 단순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법관으로서 돈과 명예를 모두 가졌지만, 죽음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덧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인 게라심의 진심 어린 돌봄 속에서야 비로소 용서와 참된 삶을 체험하며, 죽음의 순간 극적으로 구원받는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지나치게 종교적 교조주의에 기대어, 제도 안에서 나름 성실히 살아온 이반의 삶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법관으로서 공정함을 지키고, 권력자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개인적 부패와도 거리를 둔 삶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존중받아 마땅한 태도이기도 하다. 특히 예전에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와 많이 대비된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유와 본능에 충실한 한 인간의 쾌활한 삶을 노래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똑같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반 일리치의 삶은 사회적으로 보면 모범적이다. 그는 법관으로서 공정하게 판결했고, 권력자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개인적 부패에도 물들지 않았다.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도리어 귀감이 되는 공무원상에 가깝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도덕적 잣대 아래에서 그의 삶은 ‘가짜’로 판정된다. 그는 체면과 규범 속에 자신을 가두었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자기 삶의 공허함을 깨닫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스러운 자각을 통해서만 진실한 구원에 닿을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조르바는 처음부터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는 삶을 이성으로 재단하지 않고, 본능과 충동에 몸을 맡긴다.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춤추며, 죽음조차 자연의 일부로 끌어안는다. 그의 삶은 실패와 후회로 가득하지만, 그 모든 것마저 “인생이니까”라며 소화해버린다. 문학 속에서 조르바는 한없이 매혹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이야기가 달라진다. 조르바는 여성에 대해 지금 기준에서 보면 불편한 태도를 보이고, 책임을 회피하며, 공동체적 책임에는 무관심하다. 모두가 조르바처럼 산다면 사회는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이반과 조르바는 두 극단을 보여준다. 하나는 체제 안에서 절제와 윤리를 지키며 살다가 죽음 앞에서야 참된 삶을 자각한 인간, 다른 하나는 죽음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매 순간을 불태우며 살아버린 인간이다. 톨스토이는 전자에게 종교적 성찰을, 카잔차키스는 후자에게 생의 찬가를 부여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다시 읽을 때, 이반의 무난한 삶 역시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여였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조르바의 자유는 매력적이지만 타인에게 무책임한 위험을 품고 있다.


나는 두 인물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서로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거울 같다고 느꼈다. 죽음 앞에서야 삶을 되찾는 이반과,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한 조르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이 두 태도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일지도 모른다. 제도의 안에서 성실히 살아내면서도, 동시에 순간을 놓치지 않고 뜨겁게 사는 것. 문학은 이 두 극단을 대비시킴으로써, 오히려 균형 있는 삶의 가능성을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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