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위해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경험이 필요한가

장강명 <소설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얼마나 필요한가> 중에서

by 고희수

나는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스파이더맨의 비극은 적당한 힘에 너무 큰 책임이라면, 어린 나의 비극은 적당한 고통에 너무 큰 감정이었다. 아이의 감수성은 마치 프리즘 같아서 한줄기 빛을 쏘면 총천연색으로 쪼개진다. 그 색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얼마나 처절한지 지금의 나는 돌이켜보곤 하지만. 당시에 나는 고통에서 불거지는 다양한 감정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언제는 행복했고, 언젠가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했다. 하지만 행복은 쉽게 지워지고 고통은 더 크게 자리 잡았다. 이런 것들을 스스로 이겨낼 힘이 없었다. 안 좋은 기억도, 슬픔도, 외로움도 빨리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30대가 된 지금은 ‘휴지통으로 보낸 뒤 비우기를 한다’로 최적화된 인간이 됐다. 마음에 담고 있기 껄끄러운 것들은 되도록 빨리 잊어버린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너무 알아서 잘 돌아가는 건지. 좋은 기억도, 행복한 순간도, 좋았던 관계들도 잊어버린다. 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가도, 망각해서 불안하다. 내가 놓치고 잃어버린 게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머리로는 뒤끝 없이 털고 나가는 내가 좋지만, 마음 한 켠은 내내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배에 매달린 닻처럼, 둥둥 떠서 떠내려갈 나의 기억과 감정들을 어딘가에 접붙여 놓기 위해 글을 쓰는가 보다 한다. 망각 저 너머로 흘러가 사라질 것들을 여기 매달아 둔다.


장강명 작가가 알라딘에서 연재 중인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2> 연재를 읽다가 언제부턴가 뜸해진 걸 알았다. 최근에 올라온 글에서 그의 아내가 암에 걸렸고, 수술실을 들락거리는 나날을 보내고 있단 걸 알게 됐다.

작가는 고통받고 있는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고통받는 나와 소설가의 공통분모로 칼럼을 작성한다. 화자의 어투가 덤덤하다. 그의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서 더 슬프다. 고통 속의 작가는 소설가에게 절대적인 고통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제 생각에는 고통이 어떤 사람의 가치관을 바꿀 수는 있고 한 주제에 대한 집념을 불러올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 생산적인 해답을 주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해서, 이전에 반짝반짝해 보였던 것들을 허무하게 만들어서 벌어지는 일일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많은 욕망을 잃습니다. 그는 식욕과 성욕을 잊고, 명예 같은 것을 고민하지 않게 되며, 공동선이니 문학이니 하는 허울 좋은 개념들을 다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아픈 것은 슬픈 일이다. 평범한 일상을 지속할 수 없고, 신체의 고통을 수반한다. 동시에 나의 아픔은 이겨낸다는 다짐을 하거나, 포기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은 선택할 수 없다.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옆에서 함께 앓는 것밖에 없다. 나는 아프지 않지만, 그래서 더 아프다.

누군가 작가에게 이 경험이 더 큰 문학적 도약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고 위로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아픔 속에서 내 인생에 펼쳐뒀던 여러 성과와 목표는 의미를 잃는다. 아픔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아픔 뒤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옆에서 함께 앓는 사람은 욕망을 잃고 나에게 중요한 것들은 허울이 되고, 그 허울들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게 된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가에게 필요한 건 비극이 아니라 지속할 수 있는 고통이라고 말한다.

적당히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에 대해 자꾸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이 고통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고통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나? 어떤 사람이 그런 질문에 오래 매달리다 보면 단단하고 독특한 답안을 제출할 수도 있겠습니다.


너무 큰 고통은 사람의 근간을 흔든다. 하지만 적당한 고통은 근간을 향해 자꾸 캐묻게 한다. 신발 속에 들어있는 작은 돌멩이처럼. 불편하고 가끔은 피가 나게 하는 것들 말이다. 넌 거기 왜 있니? 난 왜 아플까? 어떻게 털어버릴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다 보면, 스스로 답을 매기게 되고 그 답 안에서 쓸 것들이 나온다.


고등학생 때 문창과 준비를 한 적 있다. 청소년 문예대회를 다니며 글을 썼다. 번번이 실패할 때 나는 내게는 큰 고통이 없어서, 남들이 겪어보지 못한 고유한 고통이 없어서, 무엇보다 큰 고통을 삼키지 않고 갖다 버려서 상을 탈만한 글을 쓸 수 없구나. 하고 포기했었다.


지금 내가 그때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너에겐 이미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있고, 그걸 다 들여다볼 용기가 없다면 그 주변이라도 돌면서 글을 써보라고 말했을 것 같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지금에 와서야 다시 글을 쓰며 조금 알게 됐다. 장강명 작가가 말한 것처럼 고통의 둘레를 계속 돌면서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게 글쓰는 사람의 일 같아서이다.


글을 마치며 장강명 작가와 아내분에게 평안이 오길 기도해 본다.


https://tobe.aladin.co.kr/n/51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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