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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사비맛 찹쌀떡 Jun 01. 2022

환경에도 less가 아니라 more가 필요한 것이 있다

5월 31일은 바다의 날이다. ‘~의 날’을 어떻게 다 기억하겠냐만은, 개인적으로는 5월 31일은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해양 쓰레기를 주웠던 날이라, 이제 잊히지 않는 날이 되었다.


처음엔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흙 속을 뒤져보거나 바닷속에 들어가야만 쓰레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내가 ‘인지’ 하지 못해서 보이지 않았던 것임을, 쓰레기를 줍고 보니 알게 되었다. 덩어리가 커서 쉽게 눈에 띄는 쓰레기가 있다고 한들, 우리의 시선은 그저 에메랄드 빛 바다로 먼저 가버리니까.


‘보려고 하니까’ 정말 쓰레기가 보였다. 그날도 쓰레기를 줍고 나서 소감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안 보인다 생각했는데, 쓰레기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말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보통 환경 문제를 말할 땐, 과하고 넘쳐서 문제인 것들이 많다. 무분별하다-라는 표현이 많이 쓰인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무분별하게 탄소 배출이 이뤄졌고, 농약 사용이 과하고, 벌목을 지나치게 했으며, 물과 전기를 아낌없이 사용했다는 등… 이러한 문제 지적에 대해 우리도 반발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런데 환경 문제를 조금이라도 더 해결하기 위해서 앞으로 줄이는 (less) 것이 아니라, 더 (more) 필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

바로 환경인지 감수성이다.


최근 회사에서 양성평등교육을 들으며 ‘성인지 감수성’을 배웠다. 경력단절 여성 대신 고용 중단 여성, 스포츠맨십 대신 스포츠 정신, 유모차 대신 유아차, 몰래카메라 대신 불법 촬영 이란 ‘평등’한 단어를 써야 한다는 내용에서는 조금 충격이었다. 성인지 감수성이 낮은 편이 아니라 생각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쓰던 단어들이 사실은 평등한 표현이 아니었다니. 차별적인 언어 사용이 우리의 사고와 문화에 뿌리 깊게 박혀있어서, 강의하시는 분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셨다. 정말 조그마한 변화는 지속적으로 발생하지만, 큰 변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꾸 이렇게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환경 문제를 다루는 언어 사용도 비슷하다. ‘무책임한 행동’, ‘탐욕스러운 국가’, ‘양심적 기업등으로 편을 가르고 구분을 지으면서, 환경을 오염시키는 주체가 누구인지 따지기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주의를 집중할  조금  나은 방법으로 해결 방법을 찾을  있지 않을까.


“~해야 한다 라는 수사법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게 들고, 그래서 하기 싫게 만든다고 한다.


우리는 탄소배출을 줄여야 한다. 쓰레기 발생량을 줄여야 한다.라는 말은, 사실  당연한 말이긴 하다. 그러나 차라리 “~ 원하기 때문에 ~ 하기로 선택한다.”  말해보면 어떨까?


가령, '나는 분리수거하러 나가는 횟수를 줄이고 싶기 때문에, 일회용품 구매를 줄이기로 선택한다' 라던지.


비난과 책임의 화살이 누군가에게로 향해 있는 언어는, 분명 그 책임 소재가 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차별이라는 폭력성을 지닌다. 차별적 언어의 폐해는 남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게 되어, 상호 신뢰가 떨어지고 결국 해결할 수 없는 결과, 부정적인 행동을 낳는다고 한다.


그러니, 특정 대상을 공격하는 대신 우리가 환경 인지 감수성을 조금 높여서 ‘우리 모두가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한다’고 말해보자.




마셜 B.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를 참고했습니다.

사진 출처 Raimond Klavin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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