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엔 에어컨은 없어도 유쾌함은 있어
엄마에게.
엄마, 어제가 중복이었어. 중복은 매 년 같은 시기에 돌아오지만, 왜 우리가 느끼는 더위는 매 년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매 해마다 역대급 더위가 갱신되고 있어. 생각해보면 난 고등학교 다닐 때 에어컨도 없었던 것 같은데. 고작 선풍기 몇 대로도 여름을 날 수 있었잖아. 우리 집에 있던 에어컨도 여름 내내 한 번도 안 켰던 기억도 나. 내가 에어컨을 켜자마자 쪼르르 가서 끄시던 아빠 덕분에,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맞바람으로 시원한 여름을 났었지.
이렇게나 찌는 듯한 날씨에도 아니 세상에 프랑스엔 에어컨이 없어. 회사에도, 집에도 에어컨이 안 나와. 럭키한 날엔 에어컨이 나오는 신형 메트로를 탈 수 있지만, 그런 날엔 하루의 운을 다 쓴 기분이랄까. 너무 더우니까 나라에서도 안내문이 나오더라고. 일명 ‘더위를 참는 법’. 더위를 피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잘 참을 수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시는데, 그 방법도 피식 웃음이 나오는 수준이더라.
그러니까 더울 때 뭘 해야 하냐면, 일단 생수병에 물을 채우고 얼려야 해. 얼음물이 있어야만 가능한 방법이라서, 얼음물이 준비되지 않으면 더위를 참는 시간이 조금 더 연장될 거야. 얼음이 땅땅하게 생긴 생수병을 꺼낸다음에 바람이 잘 부는 곳에 두고 선풍기를 켜서 얼음물 뒤편으로 놓아. 짠, 이게 끝이야. 너무 간단하고 어이없지 않아? 난 심지어 집에 선풍기도 없어서, 한국에서 사간 휴대용 미니 선풍기를 켤 수밖에 없었는데 시원할 리가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시체처럼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어. 가만히 있으면 땀은 안 나니까.
아무래도 파리의 건물이 다 오래된 빌딩들이니까 건물에 구멍을 내어 에어컨 실외기를 설치할 수도 없고, 기본적으로 없이 사는 문화라고 이해할 수 있어. 그럴 수 있지. 그런데 회사에도 에어컨이 없는 게 말이 되냐고? 나름 국제기구잖아. 5층짜리 건물에서 에어컨이 나오는 방은 단 한 칸. 땀 흘리며 일하다가 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노트북 가지고 에어컨이 나오는 워크룸으로 피난을 가. 그럼 나처럼 피난 온 다른 팀 사람들이 이미 여기저기 앉아서 일하고 있어. 그런데도 에어컨 없는 각자의 방에서 일하는 사람이 70%는 넘는 것 같아! UNESCO나 OECD만 가도 에어컨은 나올 것 같은데, UNEP 빌딩이 오래되긴 좀 오래되었지… 그나마 내가 더위를 잘 참는 편이니 다행이지만 나에게도 에어컨 없는 프랑스의 여름은 힘들었어.
한편으로는, 여름의 더위는 잠깐이고 노약자만 아니라면 다들 어느 정도 더위는 참을 수 있을 텐데 에어컨에만 의존하며 전력을 소비하는 우리나라(및 이런 환경에 있는 다른 모든 나라들)가 언제까지 이렇게 에어컨을 켜대며 살건가… 싶어. 요즘 기후변화를 비롯한 환경 문제는 꽤나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거든. 탄소 배출을 줄여야 지구온도가 낮아지는데, 에어컨을 끌 수 없다면.. 계속해서 에너지를 써서 냉방을 해야 된다면 지구온도는 과연 낮아질까? 기가 막힌 기술적 진보가 얼른 나와야 할 텐데.
더운 여름날, 에어컨 없는 파리에서 불쾌지수가 높아질 땐 말이야, 이렇게 더위에 헥헥 거리는 것만 같은 곰돌이를 보면 돼. 정말 너무 귀여워서 웃을 수밖에 없거든.
엄마.
생각해보니 사실 우리가 가진 여름의 추억이 많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도 하나, 순백색의 슬리브리스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모습은 자주 생각 나. 백화점의 영패션 브랜드에서 어떻게 이런 걸 입냐고 쑥스러워하는 엄마에게 내가 골라준 옷, 입어보니 너무 예쁘고 어울려서 엄마도 사버렸던 그 옷을 입은 엄마의 모습이 나에겐 우리의 여름이야. 중복의 더위도 날려버리는 천사 같은 미소를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