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방식으로 채워지는 파리의 여름 가운데
엄마에게.
칠말팔초라는 말이 사실 옛날 말이지만, 여전히 7월 말에서 8월 초의 기간에는 민족 대 '휴가' 시즌이잖아. 뭐 민족 대휴가 시즌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는 겨우 5일 휴가를 내고 주말 붙여서 놀러 가는 정도인데 정말 유럽은 여름휴가를 위해 살아가는 곳이더라고. 칠말팔초가 뭐야, 칠월과 팔월 두 달 내내 도시가 텅 비어버리는 민족 대 '휴식'의 시즌인걸.
파리의 사람들은 휴양지로 떠나고, 각기 자기 나라에서 휴가를 받아서 온 사람들이 파리를 채우는 여름. 회사에서도 동료들이 한 달씩 휴가를 떠나기 시작했어. 열심히 살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안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달이나 자리를 비우면 일이 되냐고 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도 초등학교 교사로 한 달 방학도 있고 했잖아. 휴가 좀 오래갔다 온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더라. 서로의 휴가 기간을 존중해주는 문화가 좀 멋있었어. 굵직한 국제회의는 7~8월엔 열리지 않잖아. 마치 우리나라에서도 월요일과 금요일엔 회식을 하지 않는 것처럼!
고작 인턴이고 컨설턴트였던 나는 휴가가 없었어. 말하고 보니 유럽에선 휴가가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당연하지만 정규직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였어. 그래서 마치 한달살이 하듯 파리지앵처럼 휴양지로 떠나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프랑스에서도 은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있었구나.
만약 나에게도 1년의 달력 중 한두 달을 비울 수 있다면 무엇으로 채우려고 했을까? 유럽 사람들처럼 강박적인 휴식을 가지려 할지, 한국 사람들처럼 열심으로 미래를 위한 준비를 했을지, 엄마가 생각하기엔 난 어떤 쪽일 것 같아? 겨울보다 여름을 더 좋아하니까 아마도 여름의 두 달을 비웠을 거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과거의 나는 모든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준비하고 공부하며 두 달을 보냈을 것 같아.
그런데 엄마, 지금의 난 그 두 달을 온전히 비워둔 채로 놔두고 싶어. 치열하게 사는 삶이 가치 없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내가 노력하고 채우려고 해도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우리네 삶이더라. 비워둔 채로 그냥 그 시간들이 나에게 어떠한 기회와 놀라움으로 다가올지 기대하는 게 더 재밌잖아. 그 시간들이 비워져 있다면 사실 뭘 해도 다 괜찮잖아. 계획만 실컷 했다가 계획대로 지켜지지 않은 두 달을 보냈다면 후회와 자책이 남겠지만, 이제는 난 자기 계발을 위한 계획과 자신과의 약속으로 꾸며진 날들이 아닌 다른 시간을 맘껏 가져보고 싶어!
엄마.
파리지앵들이 여름휴가를 떠났어도 파리는 비워져 있지 않아. 그 속에 살아가는,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해서 자극을 던져주고 있어. 박물관에서, 센 강에서, 에펠탑을 바라보며 하는 피크닉을 통해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놀라움과 자유로움을 가져갈 기회가 살아 숨 쉬고 있어. 여러 가지 계획으로 채웠더라면 알지 못했을 비워짐의 즐거움.
근면성실이 습관인 한국인이지만, 두 달씩 자리를 비우는 여름휴가를 권리로 주장하는 유럽인들 가운데서, 나는 그냥 내게 주어진 수준으로 비우고 또 채우며 그걸 즐거이 여기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