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는 신의 직장이 아니다

국제기구가 뭐하는 곳이냐면...

by 와사비맛 찹쌀떡

1. 나는 영어 전공자로 국제협력 팀에서 제너럴리스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국제기구, 국제 NGO, 그리고 국제기구의 로컬 센터로 차근 차근 경력을 쌓아갔다.


연차가 쌓이면서는 채용 과정에도 투입되어 인턴이나 계약직 컨설턴트 면접을 여러 차례 진행할 수 있었다.


면접에서 지원 동기를 물으면 십중팔구 하는 말이 “국제기구 경험을 쌓고 싶다"였다.

그럼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국제기구란 어떤 곳일까? 국제기구가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이길래 오고 싶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국제기구 경험을 쌓고 싶다던 사람들도 국제기구가 어떤 곳인지 잘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장점이 있길래 국제기구란 곳이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어떤 곳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국제기구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걸까.

왜 국제기구의 단점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걸까.


2. 반기문 전 UN사무총장님께서 우리나라에 국제기구란 존재를 각인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

이어 UNOCHA (인도지원 조정실) 사무차장보 출신인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님이 또 한 번 한국인으로서 UN의 지도자 자리에서 활약하시면서 국제기구라는 곳의 윤곽이 더 드러날 수 있었다. 김용 전 세계은행 총재도 한국계 미국인이고, 현직에 계신 분으로는 이회성 IPCC 의장님이 국제기구를 이끌고 계신다.


BTS가 UN에서 연설을 하면서 국제기구란 곳에 대한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예전에 비해 국가에서 선발하여 국제기구로 파견을 보내는 제도도 많아졌다.



3. 내가 경험했던 국제기구는 그야말로 '열린 소통'의 장이었다.


가장 큰 문화충격을 느꼈던 건, 이어폰을 끼고 근무를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한국에서는 정부부처와 공기관에서만 일해봤던 나는 이어폰을 끼고 일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이었다.


또 한 가지,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주인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제기구에서는 어떻게든 선을 긋고 우리 일 아니라고 넘기려는 태도를 본 적이 거의 없다. (물론 일 안 하는 뺀질이가 아예 없진 않아서 '거의'라고 한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제기구 초년생이었던 내 눈에 당연하겠지만 모두가 너무나 넘사벽 실력자로 보였다. '나만 잘하면 돼'라는 분위기에서 정말 실수하지 않고 배우려고 했었다.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직원의 성장을 기꺼이 장려해주었다.



4. 그러나 국제기구는 생각보다 혁신이 없었고 생각보다 고인물이었다.


나는 재계약이 보장되지 않은 계약직 신분이었고, 실제로 국제기구에는 P(Professional)자를 달고 있는 정규직보다 컨설턴트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정이 있다.


계약직 직원의 재계약 여부는 회원국가들의 펀딩 규모나 사업의 성과에 따라 좌지우지되었고, 무엇보다도 인맥이 한몫한다는 의외의 현실이 있었다. 아니 요즘 시대에, 누가 인맥으로 채용을 한다고!라고 생각이 되신다면, 바로 국제기구에서 그런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 할 수 있다. 그저 알고 지내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현재 국제기구에 근무하고 있는 상사'였다. 그래서인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네트워킹에 (과장하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국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느린 행정절차. 그리고 너무나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서로 다른 업무 스타일에 일이 진전되지 않을 때도 있고, 답답한 사람(=한국 사람)이 결국 다 하게 되는 상황도 자주 벌어진다.


심지어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 국제기구로서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러-우 전쟁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소위 '중립'을 지켜야 하는 처지에,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었고 그 어떤 단점보다도 큰 자괴감이 느껴졌다.



5. UN이라는 국제기구는 여전히 우리의 환상 속에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장할 수 있는 열린 조직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으로, 또는 환경을 위하는 마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가난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국제기구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국제기구와 어울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 마음에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더한다면 내가 갈 수 있는 국제기구는 장점이 더 큰 곳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국제기구란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국제기구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로는:

사례를 조사하고 정책을 분석하며 연구 결과를 도출하고, 자문을 주는 역할 (예: OECD, WB)

재원을 마련하여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도록 사업을 발굴하고 관리하는 역할 (예: UNDP)

전 세계 대표와 국가 정상들을 한 자리에 모여 최소한 1~2년에 한 번씩은 문제 해결을 하도록 판을 깔아주는 역할도 있지만 (예: UNFCCC, World Economic Forum)

국제기구도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니만큼 당연히 HR, 예산, 공보실이 있다.


국제기구를 다닌다는 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첫 연차부터 연 15일 이상 사용 가능하며 해외에서 근무한다는 멋짐, 높은 급여와 복지 혜택을 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어느 직업에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그저 세상에서 조금 더 잘 나가고, 조금 더 어깨를 으쓱 일 수 있고, 혜택만 누리기 위해서 선택했다면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과 실제 이뤄내는 결과에 대해서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곳이 국제기구라 할지라도.


UNFCCC 본부가 있는 독일 본(B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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