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5
반프에서의 마지막 날. 감사하게도 오늘도 하늘이 맑다. 마지막 날까지 남겨둔 Lake Louise를 반프 투어의 정점으로 찍고 돌아가는 날. 다른 호수들은 다 호수의 이름이 앞에 붙는데, (페이토 호수, 에메랄드 호수처럼) 레이크 루이스는 호수 이름이 뒤에 붙는다. 루이스 공주님의 이름 뒤에는 아무것도 붙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록키산맥을 3일 연속으로 보고 있으니 첫날 흥분은 온데간데없고 어쩐지 조금 익숙해진 느낌이다. 익숙해진다는 게 이렇게 무섭다. 소중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익숙함을 경계해야겠다며, 다시 시선을 리프레시해 본다.
레이크 루이스에 도착했을 때는 호수를 둘러싼 산맥에 그림자가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사진 찍는 관광객 두세명 정도가 호숫가에 서 있을 뿐 적막하고 한산했다. 지난 이틀간 ‘우와’를 연발했었던 반면, 레이크 루이스의 첫인상에서는 생각보다 깊은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여름에는 서로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사람이 빼곡히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데, 나는 편하게 사진도 남길 수 있어 다행이라는 정도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반프 국립공원의 꽃인 레이크 루이스에는 딱 하나의 숙박시설이 있다. Chateau 샤또 레이크 루이스. 조금 예쁘다 싶은 곳, 산과 물을 끼고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카페와 모텔이 들어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반프는 엄격하게 개발을 제한하고 있었다. 결국 먼저 호텔을 세운 사람이 독점하는 시장 구조를 평평하게 만드는 것과 환경을 보전하는 것 중의 가치 선택이겠지만, 건물을 세워 자연경관을 독식하는 우리나라의 개발은 내 눈에는 다소 질서를 잃은 모습이다. 여름에는 1박에 700~800달러까지 값이 오른다는 호텔을 둘러보았다. 레이크 루이스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이닝 홀만 봐도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실에서 보면 호수의 물 색도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으로 보인다고 한다.
레이크 루이스를 보러 반프에 올 정도라고 하는데 왜 나는 뜨뜻미지근한 거지? 호숫가 옆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조금 걸어보기로 했다. 왼쪽 편으로 호수가 잔잔하게 물안개를 피워내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길게 뻗은 나무와 산의 능선이 산책로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는 속도에 따라 레이크 루이스는 점점 모습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터지지 않았던 감탄이 드디어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와… 너무 예뻐… 와… 와….
호숫가에 낮게 자란 베리 나무는 어느새 잎을 다 떨구고 얇은 가지만 남아있었다. 그 얇은 가지는 자신의 몸보다 3~4배는 두껍게 쌓인 눈을 덮은 채 얼음꽃을 피워냈다. 산 밑으로 들어가는 산책길에 아직 그림자가 걷히지 않아 초아침 푸르른 빛만 남은 듯한 누아르 장면을 연출해냈다. 추위도 잊은 채 약 2시간을 산책하고 돌아왔을 때는 ‘레이크 루이스가 반프의 하이라이트’ 임을 수긍할 수 있었다.
남은 시간에는 Cave and Basin과 Johnston Canyon에 들렀다. 동굴 속 유황 온천을 발견하면서 반프가 국립공원의 형태를 갖추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역사를 배운 시간. 국립공원의 역사가 긴 만큼 ‘친환경 투어리즘’의 전통도 자랑하는 캐나다의 환경 친화적 태도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자연과의 공감대 회복’이라는 개인적인 의견을 Cave and Basin에 남기고 왔다. 자연을 경험한 사람은 자연과,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공감대가 회복될 때 분열과 갈등이 사라지고 자연 질서도 되살아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Johnston Canyon은 적당한 트래킹 코스로 돌아보았다. Lower fall, Upper fall, Ink pot 순서로 점점 트래킹 난이도가 높아지는데 눈이 와서 현재 Lower fall만 갈 수 있었다. 절벽을 따라 난 트레일을 걸으며 얼어붙은 호수, 절벽 사이로 난 나무들, 그 위에 쌓인 하얀 눈을 보았다. 잠깐씩 들렀던 호수도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았지만, 다음에 반프를 또 올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트래킹을 제대로 해 보고 싶다.
산을 걸으며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에는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내적인 변화가 분명 일어나게 마련이다.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걱정거리의 크기가 작아지고,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유독 신경 쓰이던 일도 별거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나의 사소한 염려보다 더 큰 무엇, 창조주의 생명과 사랑을 느낀다면 절대로 이전과 같은 모양새로 살아갈 수 없다. 이 점이 바로 우리가 자연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이지 않을까.
3일간의 록키 투어를 끝냈다. 이 감동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좋은 걸 나눠주고 싶은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자연을 경험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너무 좋다고, 정말 좋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