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3
내가 과연 반프에서 본 것을 글로 쓸 수 있을까. 기껏 일기 수준의 기록이지만 감히 내 글로 반프의 자연을 담으려니 부담이 크다. 손가락이 자꾸 키보드에서 미끄러진다.
캘거리 여행의 꽃인 반프 국립공원으로 출발하는 날, 날씨는 좋았다. 구름 하나도 허락하지 않는 깨끗하고 맑은 하늘이었지만 사실 영하 27도였다. 옐로나이프에서 추위를 겪어봤다고 그새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영하의 기온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다 녹지 않은 도로에서 안전하게 이동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투어를 시작했다.
눈으로 덮인 1번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시야에 록키산맥이 걸린다. 정면을 바라봐도, 창 옆으로 고개를 돌려도 시선에 닿는 곳에는 록키산이 있었다. 1시간을 달리는 내내 록키산맥과 함께였다.
하필이면 곤돌라가 보수 공사 중이라 아쉬운 대로 우선 Norquay산 중턱으로 올랐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이미 눈이 한가득이었다. 제주도에서는 조금만 눈이 와도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막히는데, 눈으로 도로가 완전히 덮인 상태에서 구불구불한 산 길을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눈이 쌓여 있었다. 그 사이로 Mule Deer (사슴 종류)라는 귀여운 동물 친구들이 지나다녔다. 반프의 ㅂ도 시작하지 않았자만, 벌써 흥분이 가득했다.
속내를 얘기하자면 나는 사실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도 모른 채 반프에 왔다. 반프가 세계 3대 국립공원이란 것도 몰랐고, 록키산맥이라는 건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다. 지식도, 정보도, 기대도 없는 백지의 상태에서 반프의 인상과 기억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Norquay에서 내려와 이동한 곳은 Minnewanka Lake였다. 미네완카 호수의 첫인상은 신비로웠다. 아직 얼지 않아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호숫가를 하얀색 눈 옷을 입은 산이 막아주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호수는 윤슬로 빛이 난다. 캐나다의 건조한 눈인 건설도 빛 아래 반짝인다.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주변을 살짝 걸어보았다. 파란 하늘, 하얀 눈, 초록색 침엽수림으로 풍경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하얀 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던가. 코가 빨개질 정도로 추운 공기에 콧물을 훌쩍이면서 반프의 첫 경험을 시작했다.
조금 이동해서 Two Jack Lake를 지났다. Minnewanka Lake 만큼 가까이에서 구경한 건 아니고, 어딘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다. 여름이면 캠핑장으로도 인기가 많다는 이곳도 역시 물안개가 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호숫가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여기서 캠핑을 하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온통 깨끗한 환경 속에서 마음의 탐심과 입술의 죄를 저절로 반성하게 되려나. 아니면 이곳까지 와서도 스트리밍 드라마를 보고 소셜미디어를 하게 되려나. 캠핑을 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기차에서, 또 카페에서도 디지털 기기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고, 그때마다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잠깐 손에 든 기계를 내려놓고 지금 이 계절의 자연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캠핑 와서도 그렇게 되려나? 반프는 통신이 터지지 않은 곳이 많았는데, 어쩌면 쓸데없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얀 산과 크리스마스트리 나무가 이어지는 도로를 더 달려 쿠트니 국립공원 쪽으로 이동했다. 이번에 들린 곳은 Marble Canyon. 이곳에서 내가 잠깐 지구 위 어느 곳이 아니라 다른 세상 어딘가에 도착한 줄 알았다. 계곡은 졸졸 흐르는데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은 다 하얀 눈으로 덮여있다. 크리스마스트리 나무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하얗고 반짝인다. 나무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눈이 앉을 수 있는 곳에는 다 살포시 눈이 포동포동하게 덮여 있다. 이파리를 다 떨궈낸 나뭇가지에도 눈이 붙어 마치 강아지풀 같이 얼음꽃을 피워낸다. 관광객이라고는 우리뿐이었다.
아, 반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 뭔지 조금씩 알 것 같다. 아름다운 자연을 경험하며 자연을 경외하는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반프. 오늘은 마지막 코스로 Bow River에서 내려 폭포를 따라 산책을 하며 마블 캐년에서 붕 떴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산책 길 따라 들어선 벤치에는 ‘…를 기억하며’라고 소중한 사람들의 추억을 새겨놓았다. 마릴린먼로가 투숙했다는 Fairmont Banff Springs 호텔이 올려다보였다.
자연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와 추억이 남아있는 반프. 시작부터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