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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사비맛 찹쌀떡 Dec 14. 2022

불안해서 가능했어요

#4. 네 번째 이야기. 임가영 번역가



“안주하지 않고 싶어요. 늘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아직도 매 순간 최선을 다 합니다."


글로벌 IT기업에서 현지화를 담당하는 임가영 번역가를 만났습니다. 창 밖으로 고목이 보이는 동네였어요. 미니멀한 집 안에서 상큼한 화이트 와인을 앞에 두고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안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평소에 ‘내적 안정’이 주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임가영 번역가와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한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안정’이 흘러나왔어요.



1. 결국 내가 한 대로 돌아와요.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처음 취업한 곳은 공공기관이었어요. 전문분야를 다루는 기관이라 통역과 번역을 하기 위해서 옆 직원들에게 수 없이 찾아가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본인의 실수로 큰일이 나면 안 되니까요. 스스로가 해야 할 몫을 다 해내고자 하는 책임의식으로 집요하게 배웠던 첫 직장이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 같네요.


그 후 임가영 번역가는 정부 조직으로 이직합니다. 이곳에서도 또다시 새로운 배움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하면서도 끈질기게 해냅니다.



번역만 연습한 것도 아니에요. 심지어 처음 해 보는 뇌과학 통역도 해냅니다. 하루는 뇌과학 의사들이 모인 콘퍼런스의 강의 통역이 들어와서 덥석 한다고 했어요. 당시 주어진 프레젠테이션 자료만 3,000장이 넘었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한 장에 하나만 있어도 3,000개인데요, 생전 처음 보는 의학 용어를 다 외웁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밤잠을 아껴가며 공부해요. 드디어 콘퍼런스 첫날, 통역을 마친 그에게 “혹시 전공이 의학이에요?”라고 물어왔다고 해요. 잘해 낸 거죠.


임가영 번역가는 연차가 쌓여 갈 때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글로벌 IT기업의 벤더사로 옮기고 나서는 통역 일 대신에 현지화를 하는 마케팅 번역에 주력하게 되었습니다.


현지화란 Localization을 말해요.


즉, 한국의 소비자에게 맞도록 한국 현지의 문화나 관습, 언어적 특성을 고려한 번역의 종류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원문이 미국에서 쓰여서 미국 팝가수의 말을 인용하여 작성되었다면, 한국 소비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K-팝의 맥락으로 바꿔서 번역 작업을 하는 거죠. 혹은 한국에 출시가 되지 않는 제품이라면 원문에는 분명 제품 소개가 있었지만 한국 사정에 맞도록 해당 부분의 번역을 생략할 수도 있어요. 최적화된 번역이라고 볼 수 있죠. 어쩌면 궁극의 번역이 아닐까요? 결국 독자나 소비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아웃풋이 나와야 하거든요. 현지화 번역이 꼭 그렇습니다. 콘텐츠에 따라 정보 전달 위주의 번역이 요구된다면 현지화의 요소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읽힘성(Readibility)이 좋은 번역이어야 한다는 본질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광고를 현지화해야 하는 일은 연차가 있다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회사를 옮기고 거의 1년간은 계속 고군분투했다고 해요.


어떤 번역이 잘 된 번역인지 보는 눈을 기르고, 숙련도를 높여야 했던 시간이었죠. 정말 처절했어요. 스스로 얼마나 못하는지 매 번 봐야 했거든요.



그러나 비판을 달게 인정하고 개선하기 위해 집중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번역 연습량을 늘리기로 결정해요. 그래서 주말에는 출판 번역까지 하게 됩니다. 본인의 이름으로 번역서가 몇 권씩 나오고, 자신의 번역이 양적으로 쌓여가며 아하-! 모먼트까지 만나게 되어요. 그리고 결국 성장합니다. “잘하셨네요.”라는 인정을 받은 첫 순간을 기억해요.



정말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었지만, 그 시점을 시작으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처음 인정받은 그 이후, 저는 다른 사람이 된 거죠.



일을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서는 정말 재밌게 일했습니다. 노력한 시간이 쌓이니 일의 속도와 효율이 높아지고, 곧 시니어까지 올라가요. 당연히 보너스도 나오고 연봉도 10%가 오른 적도 있고요. 그렇게 오랜 노력의 결실이 실력이 되어 지금의 안정을 견실히 받치고 있습니다.



2. 일에서 발견하는 가치가 있어요. 미처 몰랐던 부분까지도요.



실제로 글로벌 기업의 벤더사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카피와 밸류 페이지를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한 기업이 어디에 가치를 두는지,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인지 일을 하며 알게 되는 정보들이 재밌었다고 해요. 특히 환경에 대한 고민이 깊은 점이 기억납니다.



“자원을 조금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폐기계와 폐자원을 최대한 재활용해서 새 제품으로 만드는 수고로움, 기계를 변경해도 동일한 액세서리를 사용할 수 있도록 포장과 구성을 바꾸는 전략, 거대한 데이터센터를 가동하는데 드는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원으로 소비하는 모습, 해외 출장 대신 온라인 플랫폼의 확장성을 키우고 적극 활용하여 온라인으로 소통을 하려는 노력이 있어요. 사회가 기대하는 기업의 책임을 다 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협력 업체의 인권에 대한 책임까지 포함하여 이런 움직임 하나하나에 글로벌 기업들은 참 진심이었습니다. 저도 미처 몰랐던 부분이 많았고, 저와 같은 소비자들은 잘 모를 수도 있는 기업들의 가치, 밸류가 제 작업을 통해 소개될 수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3. 주도적이어서 만족스러워요. 능력을 발휘하고 더하여 기여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임가영 번역가는 시키는 일만 그저 그렇게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집어내어 주체적으로 개선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업무량이 늘어날 수 있지만요, 제안하는 점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주고 그 결과에 대한 보상과 인정이 따를 때 보람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고 해요.



“여기까지 오는 길에 참 많이 노력했어요. 물론 직장마다 환경이 다르고 함께 일하는 사람도 다양하니까 쉽지 않은 순간은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 일은 제 얼굴이잖아요. 제 일의 결과가 결국은 제 레퍼런스가 되어줘요. 그러니 뭔가 불합리하다고 당장 때려치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뜯어말리고 싶어요. 그러지 마세요. 오히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준비하세요. 노력을 배신하는 미래는 없습니다.”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열심히 노력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불안’을 꼽습니다. 잘하지 못해 불안했기에 더 공부할 수 있었고, 불안 속에서 버티기 위해 늘 준비했다고 합니다. 지금 불안하신가요? 어쩌면 임가영 번역가의 태도에서 우리는 답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안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준비하는 거잖아요.”



지금 당장은 현지화 번역으로 통역은 전혀 하지 않지만, 언젠가 올지도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통역 무대를 위해 10년 째 통역 스터디를 하며 하루를 깨우는 임가영 번역가. 누군가의 성공, 성장 이야기는 꼭 남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만, 임가영 번역가의 지난 10년은 탄성을 자아낼 만큼의 노력이 있기에 새로운 시선으로 보입니다.


전체 인터뷰는 유튜브 <오와한자연> 채널에서 확인하세요 !


Youtube: http://youtube.com/@owh_earth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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