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울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 동굴 속에서 나오는 방법이 이번엔 달랐다

by 장서율

또다시 꽤 오랫동안,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헛된 믿음과, 방향이 잘못된 것 같은 꿈과, 끝없는 자기 위로 속에 희석된 이야기들이 몽글몽글 작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어올랐다가, 자판 위 공백을 마주하면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갔다. 공허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매일의 일을 하는 것도. 그렇게 꽤 오래 방황하다 다시 또 튀어올랐다. 온전히 혼자가 되어 하루 정도 책을 읽고 나서 말이다.


소설책을 한 권 빌렸다.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10년 전에 발간된 소설이다. 마치 어린 날의 내가 양귀자 씨의 '모순'을 읽었을 때처럼,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을 네 남녀의 아픈 이야기와, 바스락거리는 메마른 듯한 문체 속에 강한 울림을 주는 새벽녘이 그 안에 그려져 있었다. 나는 비가 부슬부슬 오가는 토요일 하루 반나절을, 노란 표지의 이 책과 씨름하며 보냈다. 한 찹터를 읽고 잠시 생각하고, 또 읽으면서 내 안에 일어나는 '스토리 텔링'에 대한 갈망을 바라보며, 난 참 게으르다는 자기 비난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나는 또 절망 속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의 등을 바라보며, '너를 사랑해, 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냥 가버려'라는 말도 안 되는 고백을 꿈꾸면서. 버림받고 외면받은 아이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하루 24시간 중에 8시간 정도를 자고, 2시간 정도를 먹고, 또 6시간 정도는 미친 듯이 집중해서 먹고살기 위한 일을 한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시간 중에는 늘 그를 생각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내 옆에 계속 있었다. 그렇게 내 생활 속에 공기처럼 함께했다. 자신은 깊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굳이 밀어내는 그의 차가운 손을 생각하면, 나는 단 게 생각났다. 몇 입 먹고 나면 또 질려서 못 먹을 만큼의 단 케이크를 입에 물고 책을 읽었다. 깊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동시에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자꾸 단 것이 생각났다. 그 단 맛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를 사랑해 줄 것도 아닌데 그 안에서 위로를 찾아 헤매는 내가 가끔 안쓰러웠다.


얼마나 더 많이 의심해야 내 사랑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결국 부딪혀 봐야 깨지고 그래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오뚝이면서, 나. 지난 25년 정도는 대상만 달랐지 늘 내가 상처 받고 끝나는 사랑만 해 오지 않았던가.


*****발췌문들****


page 33. 1. 이별

내가 죽음을 찾아갈 수 없어

그가 나를 친절히 찾아주었던 날

마차엔 우리 둘만 호젓이 앉았다

그리고 영원불멸도 함께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으면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시를 다 읽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아껴가며 다섯 번은 넘게 읽은 후에 나는 이 도시에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종로의 대형 서점으로 나갔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꽉 잡은 채로. 이 도시에서 내가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책은 '말테의 수기'였다.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내게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줬던 단이가 그 책 맨 앞장에 써놓은 제목이라는 이유로 선택한 책이었다. 서점에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닫혀 있는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이 도시로 모여드는 모양이다"


***나 역시도 그렇지 않은가. 희망을 꿈꾸며 상실을 뒤로하고 이곳에 혈혈단신 오지 않았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무엇을 쫓으며 살고 있는가. 고민하지 않는 내 모습은 내가 아닌 것 같아 낯설다. 현실에 두 발 디디고 살고 있으면서, 깊이 고민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내 존재 가치가 없는 건 아닐까 늘 고민하곤 한다***


page 141 4. 소금호수로 가는 길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로 머리맡에는 별

발밑엔 바다가 있는 것 같아 난 몰랐네 - 다음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는지

어떤 이는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도무지 불안한 내 걸음걸이


발 및엔 바다가 있는 것 같아, 쯤에서 윤미루도 그를 따라 읊었다. 가끔씩 그렇게 같이 시를 읊어본 모양이었다. 둘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섞여 들었다. 나는 그와 윤미루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난 듯이 내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 무사히 들어 있는 우.리.는.숨.을.쉰.다, 를 꺼내 그와 윤미루에게 한 권씩 나눠주었다. 예기치 않았던 이 도시에서의 긴 순례가 우.리.는.숨.을.쉰.다, 를 그들에게 전해주기 위한 일처럼 느껴졌다. 고단한 일을 마친 기분이라 깊은 숨이 새어나왔다. 그와 윤미루가 우.리.는.숨.을.쉰.다, 를 펼쳐보고 있는 사이 나는 세상의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할 책상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향해 에밀리-하고 불러보았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이름을 딴 고양이.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할 고양이. 나의 20여 년 전 대학 시절 영미시 창작 수업의 결과물인 '나를 사랑하는 시 모음'이라는 책자가 지금도 내 책상 위에 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사랑과 세상은 다르지 않은데. 가끔 나는 그런 사실이 몹시 두렵다. 그 시절 내 원픽시는 여전히, 심지어 영미시도 아닌, 베를레느의 '거리의 비 내리듯'이었다니. 씁쓸하다. 지금은 적어도 내 마음속 괴로움의 실체는 깨달았으니 그걸로 된 건 아닐지.


page 195. 7. 계단 밑의 방


나는 윤미루의 얼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누군가 미워지면 그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보라고 했어. 하루를 보내고 자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자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나는 화가 나거나 힘겨우면 일단 한숨 자는걸. 자고 나면 좀 누그러져 있지 않아? 사람은 자면서 새로 태어난다고 생각해봐.

동의하지 않는지 윤미루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사이 에밀리가 침대와 연결된 사다리를 타고 사뿐사뿐 올라왔다. 에밀리는 윤미루 옆의 침대 머리맡으로 가볍게 오르더니 등을 동그랗게 세우고 발들을 흰 털 속에 파묻고 윤미루를 응시하며 턱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윤미루가 몸을 바로 하고 손을 뻗어 에밀리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책 제목 생각났어.

-무슨 책?

-소금호수와 고양이가 나오는 책 말이야

-뭔데?

-여행이 끝나면 남들한테도 말하리.

... 소금 호수에 몸을 담그고 고양이에게 인생의 마지막 얘기를 털어놓은 사람들에게 '남'이란 소금호수를 지키는 고양이었을까. 나는 그 책이 읽고 싶어졌다.


***매일 잠들 때마다 내일, 오늘과는 다른 내가 있기를 기도하던 밤들의 내가 생각났다. 철저한 자기 위로의 발언들. 나는 과연 타인을 받아들이며 살 수 있을까. 내 이야기를 그에게 할 수 있을까.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면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조차 있을까.


page 241 8. 작은 배 한 척이...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가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그거면 충분해, 를 주문처럼 두세 번 반복하곤 해. 그 대목에서 거미에 대한 두려움이 희미해지는 걸 느끼거든....


민간인 윤에게 군이 단이가.


**나의 그릇은 참 작고 못생겼다, 싶은 고백이 하고 싶어졌다.


page 301 9. 갈색노트 9


내 단 하나의 소원

저물녘 고요 속 바닷가로

돌아가고파

숲 가까이서 조용히 잠들고 싶어

가없는 바다 위엔 맑디맑은 하늘

난 화려한 깃발도 소용없어

훌륭한 집도 필요없어

다만 젊은 나뭇가지로

내 잠자릴 엮어다오

내 베개 밑에서 슬퍼할 자는 아무도 없고

마른 잎 위를 스쳐가는 가을 바람 소리뿐


우리가 함께 보냈던 빈집에서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불렀을 때엔 낭만적이고 서정적으로 들렸는데 단이 때문일까 버스 안에서 따라 부르다보니 문득 이 노래에서 죽음이 느껴져 따라 부르는 걸 멈췄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리듬 밑에 서늘한 죽음의 매혹이 자리하고 있었다니. 죽음의 비극을 제대로 모르니까, 죽음의 위협을 겪어보지 않았으니까 저처럼 아름답고 나른하게 노래할 수 있겠지. 그렇겠지.


*** 내가 사랑하는 영화나 소설 속에는 죽음이라는 게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치열하게 살고 있는 와중에 죽음이 바로 곁에 있음을 늘상 모르고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고 살고 있을 지금의 나에게. 더 이상 후회하지말고 사랑하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


page 326 10. 우리가 불 속에서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있어 고뇌는 그의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카프카 '삶과 죽음을 냉철히 바라보며 말 탄 자여, 지나가라- 예이츠,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 ...

그가 묵묵히 미루에게 쓴 작별의 편지를 노트 사이에 넣었다. 나는 노트를 덮고 책등을 뒤로 해서 꽂은 책들 사이에 미루의 노트도 뒤로 해서 꽂았다. 그가 손을 뻗어 책들 사이에 꽂힌 미루의 노트를 탁탁 두드려주었다. 그와 나는 책들 속에 섞인 미루의 노트를 바라보며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왼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왼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두어번 발을 쿵쿵거렸다. 나도 바닥을 내려다보며 두어 번 발을 쿵쿵거렸다. 그제야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 왜 나를 따라해?

-웃게 하려고!

그가 웃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정윤.

-...

-너무 애쓰지 마.

-아니, 우린 애써야 해.

-...

-그래야 해.

그가 책장에 등을 대고 섰다. 나도 그 옆에서 책장에 등을 대고 섰다.

-우리 함께 지내.

내 말이 책장들 사이를 떠돌다 메아리처럼 내게 돌아왔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내 마음은 늘 그를 향해 있고, 내 눈은 늘 그를 향해 있다. 그리고 그가 웃으면 따라 웃고, 그가 울면 따라 운다. 가련하고, 무정하고, 아름답다. 내 손은 그가 가려는 곳을 미리 찾아 그가 원하는 걸 준비해둔다. 내 마음만 저만치 멀리 가있다. 그가 찾아올 길을 마중할 수 있도록. 바보같이 그 방향으로 와줄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


page 343 갈색노트 10


산속은 우리들이 눈 털어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눈을 털다가 하늘을 보니 차가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눈을 들어 별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그렇게 자정도 지났을 것이다. 윤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눈을 털다가 다시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눈 털기를 멈추고 아래로 뛰어내려가는데 등줄기에 땀이 흠뻑 배었다. 윤 교수는 눈이 털린 노송 아래 앉아있었다. 괜찮으세요? 자네 같으면 괜찮겠는가. 윤교수가 어슴푸레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윤교수 옆에 앉아 윤이 숨차하며 나뭇가지에 쌓인 눈 털어내는 소리를 들었다. 윤교수가 깊은 숨을 내쉬며 노송 위의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윤이 소나무 위의 눈을 털어내는 소리가 산 속을 텅텅 울렸다. 내가 윤을 부르려 하자 윤교수가 만류했다. 스스로 멈출 때까지 그냥 두게.

- 갈색노트 10


**차안과 피안. '내가 그쪽으로 갈께' 라는 말. 여기에서 저기로 가는데 한 사람의 일생도 걸릴 일. 사람을 사랑하는 일. 신념을 따라가는 일. 사명을 깨닫는 일. 한 사람의 인생을 사는 일. 멀고도 험한 나의, 그를 향한 길. 에필로그에 있는 글을 옮겨 적어 본다. 이런 글을 만나면 가슴이 터질 듯 감명 받고, 눈물이 차오른다.


나의 삶이 어디까지 이를지

그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폭풍 속을 거닐고 있는가.

물결이 되어 연못 속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나는 이른 봄 추위에

얼어붙은 창백한 자작나무일 뿐인가?

- 릴케, '나의 삶'


**나의 삶 속에는 그가 있을까. 아니면 온건히 존재하는 건 나의 자의식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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