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나
'누나, 누나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나를 바라봐 주지 않는 기분은 어떤 거야?'
'... 지옥이지.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그럼 나는 지옥에 살고 있는 거네'
'넌 왜 만날 때마다 나를 죄스럽게 만드니. 너한테 참 미안해. 근데 넌 나한테 남자가 아니야 준철아.'
밤 기온은 낮아도 낮은 아직 따스한 오후, 집 앞으로 찾아온 학교 후배가 있었다. 요 앞에 취재차 왔어, 이제 다 끝났어 - 일이 끝난 고단함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쭈욱 빨아올리면서, 약간은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빛내며 준철이 말한다. 그 얼굴의 환한 빛을 나도 띄운 적이 있었지. 씁쓸하다.
은빈은 그렇게 무턱대고 과 선배 지우를 짝사랑했던 자신의 모습을 준철의 얼굴 위로 떠올려보았다. 은빈이 사랑했던 건 사랑을 하는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동경의 대상이 자신의 예쁘장한 얼굴을 언제고 봐 주리라는 기대와 설렘 때문이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꽤 오랜 기간 은빈은 지우를 자신의 눈 속에 담았다. 그가 어떤 수업을 수강하는지, 어떤 동선을 걷는지, 수업 중간에 무슨 음료수를 자판기에서 꺼내 마시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찬찬히, 그러나 집요하게 그의 뒤를 쫓았었다.
거울 앞에서 환한 원피스를 입고 자신의 모습을 단장하는 것이 좋았다. 해바라기가 되어 그가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피어나고 싶었다. 순수하고 하얀 자신의 모습을 봐준 건 그 한순 간 뿐이었을까. 지우는 어느 순간 휴학을 하고 그녀가 졸업하는 순간까지도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무성한 소문만이 과 내를 돌았으니까. 비슷한 시기에 서율이라는 과 선배도 학교를 그만두었었다. 다시 지우를 만나면, 과거의 그 감정이 올라올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면, 진짜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은 어떤 기분일까. 은빈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준철을 바라보았다.
아직, 은빈의 마음에 담긴 사람은 준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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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의 불온한 소리. 움직일 수 없는 이 시기에 서로 지탱할 건 가족밖에 없으니 집을 더 단장하겠다는 몸부림. 수많은 일인 가구들이 사는 이 대도시에, 괜찮은 척 살고 있지만 가끔은 미친 듯 외롭고, 또 동시에 사람과 어울리는 게 무서운 서율은 오늘 아침에도 이 소리에 잠을 깼다. 가족이라는 게 과연 필요한 걸까. 한 사람이 살면서 가지는 가치는 가족 말고도 많지 않을까. 지율이라고 하는, 이름뿐인 그녀의 분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혹 잊어버릴 만큼 지금의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건, 돈을 벌어먹고 살만큼 버텨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논리, 혹은 이유뿐이다.
가족이라는 의미는 서율에게 늘 이중적이었다. 가족은 그녀에게 울타리를 주었지만 그 안에서는 정서적 유대감이 없었다. 자라면서 서율이라는 존재만으로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해서 존재감을 입증해 나가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걸 자라면서 배웠고, 그랬기에 늘 숨이 막혔던 서율이었다. 한 순간도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런 감정을 느끼기 전에 막연히 사랑에 대해 동경해 왔고, 그 이전에 무한한 자유를 꿈꿨었다. 일을 하는 건 자신 있었다. 일을 통해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건조하고 잔인한 일상의 한가운데, 세월의 사이사이, 서율을 숨 쉴 수 있게 해 준 건 공연장에 가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생각을 떨궈내는 일이었다. 다소 불온해 보이는 자유의 움직임은, 동류들과 섞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으므로. 그 동질감 속에서는 숨 쉬는 게 너무나도 편안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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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이 넘어 서율이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딱 한 가지였다. 그녀가 겪은 격랑의 파도, 운명의 소용돌이,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나날들을 뛰어넘어, 한 순간도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고 사랑해 주지 않았던 그녀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한 회한. 젊음 자체로 아름답고,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인간으로서의 권리. 책을 아무리 파고들어도 배우지 못했던,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구분하는 법.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엔 한 사람이 사는 데 필요 불가결한 자존감, 존엄성, 그런 추상적인 단어들의 진짜 의미였다. 자신만 착하면, 주변인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살면, 이 한 생 무사히 넘기리라는 그런 안이한 생각이 스스로를 쥐어패고 싶을 만큼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되돌릴 수 없고, 세상에는 내 이름 한 글자를 딴 지율이라는 존재도 있다. 자신과 같이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아이로 키우기는 싫다. 죽을 만큼 싫다. 가능하다면 내 남은 생을 모두 걸고라도 아무것도 모르고 생모와 이별해야 했던 그 아이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