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억 사이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난다. 준철이 나를 원할 때, 내가 뚜렷한 목표도 없이 지우 선배를 바라볼 때, 내 몸을 탐하던 사람. 준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와 함께 할 미래가 없다는 걸 알면서, 딱히 내치지도 않았으면서. 지우에게 향해진 마음은 그녀 안의 모든 감정을 도려내어 빈 껍데기처럼 만들었다. 왜 하필 지우였을까? 그 사람은 그저 나를 이용만 했을 뿐이다. 나를 밟고 넘어가는 징검다리처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진심이 짓밟혔다는 생각에 치가 떨린다.
예쁜 모습으로 결혼하는 대학 동기들처럼, 행복하려고 무던히 애써왔던 은빈이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이사했던 바닷바람이 불어오던 도시의 연립 주택은 감옥 마냥 밖을 향한 창문에 격자 모양의 틀이 쳐져 있었다. 옹색하지는 않았어도 넓은 집은 아니었던, 햇볕이 반 정도만 들어오는 그런 층이 낮은 집이었다. 기억을 가진 순간들부터 엄마는 집에 자주 없었다. 아빠라고 불렀던 사람은 자주 늦잠을 잤다. 엄마가 일을 하러 잰걸음으로 출근하는 걸 배웅했던 적이 별로 없다. 유치원에 가는 길, 학교에 가는 길, 은빈은 혼자서 조용히 문을 나서서 그나마 가까운 거리에 놓인 ‘안전지대’로 피신했다. 수업을 듣는 동안, 피아노를 치는 선생님을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시간, 운이 좋으면 한 두 마디 쳐볼 수 있던 악보, 짝꿍에게 빌린 크레파스로 그린 창 밖의 나무들. 그녀에게는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는,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따로 갈 곳은 없었다. 집으로 향하면 반쯤 기울어진 햇볕이 그녀를 맞아주었다. 조용히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거나 세수를 할라치면 그 사람이 문을 열고 마루에 나와 달그락 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거나, 라디오를 크게 틀거나 했다. 보리차를 가득 따라 놓은 물컵을 가리키며,
‘은빈아 이리 와’라고 말했다. 은빈의 몸에 솜털이 쭈뼛 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으레 담요가 놓여있었고, 그는 그 옆에 속옷 바람으로 앉아있곤 했다.
‘아랫도리 벗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마치 목욕탕에서 엄마들이 어린애들에게 속옷 벗으라고 상냥히 말하는 것처럼. 그런 무덤덤한 톤으로 말했다.
‘담요 속으로 들어와’
처음에 그녀는 그것이 무슨 행동인지 몰랐다. 대여섯 살이 된 그녀의 몸은 아직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그녀의 몸 한가운데를 침 묻힌 손가락으로 쑤시고 찌르고 문지를 때마다, 은빈은 눈에 눈물이 맺혔고 몸은 베베 꼬였다. 그는 그런 그녀의 작은 몸을 완강하게 손으로 그녀의 내리눌렀다. 눌리고 또 눌려서 숨이 막힌 적도 있었다. 울려고 하다가도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그가 그 행위를 제발 멈출 때까지 그냥 기도하듯이 누워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 사람은 그녀의 작은 생식기에 집착했다. 삽입을 하지도, 손으로 자위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몸을 쓸고 문지르고 만지는 데 오후 시간을 보냈다. 티브이를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녀의 몇 개의 구멍들에서 체액이 쏟아져 나올 때까지, 그는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은빈에게 생리가 터진 건 열 살 무렵이었다. 가슴이 봉긋 올라오고 머리가 길고 제법 조숙한 소녀 티가 났다. 남녀 공학에 다니던 은빈은 또래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가슴을 툭툭치고 지나갈 때마다 움찔하면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올라오는데도 그냥 무시하고 두 손을 꼭 쥐고 멀리 뛰어가는 게 고작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어 은빈은 다시 안 볼 것 같은 담임 여선생님에게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주택에서는 유리창이 깨지고 격자 모양 창틀이 휘어질 만큼 큰 싸움이 있었다.
아빠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사실 친부가 아니었다. 엄마는 없었던 일로 치부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 전후로도, 그 후로도 은빈에게는 아빠가 없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 아빠라는 인간으로부터 해방된 건 참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그녀는 울고 또 웃었다. 여중에 진학한 걸 안도하며 그 일들을 애써 잊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그즈음 엄마를 졸라서 다니게 된 미술학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떤 피사체나 정물보다도 그녀는 꽃이나 나무를 그리는 게 좋았다. 풍경화를 그리다 보면, 아무도 없는 그 속에서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자신이 보였다.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아도, 어떤 소리를 듣지 않아도, 가만히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건 그런 풍경들뿐이었다.
은빈은 학교 전공으로 불문학을 택했다. 대책 없이 물 흐르듯 나긋나긋한 언어와 음악, 잘은 모르는 그 미지의 세계 속에서 아름답게 박제된 역사와 문화가 넘치는 나라, 프랑스에 대한 동경으로. 다시 남녀 공학으로 진학한 고등학교에서 그녀는 참 멋진 선배 오빠들을 많이 만났다. 외모도, 운동신경도, 공부도 잘했던 그들을 보며, 살짝은 연모하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또래들이 쓰는 러브레터 따위도 종종 써봤다. 고백하는 건 늘 실패였지만, 짝사랑은 안전했다. 한 대상을 두고 몇 개의 계절을 묵묵히 지켜보다 보면, 그녀 입꼬리에 미소가 흐르곤 했다. 가끔 은빈은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의 몸에 그 옛날의 인간이 했던 행위를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들은 은빈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알지 못하는 감정들에 휩싸였다. 아침이 되면 팬티 속에 자신의 손이 들어가 있는 걸 보고 놀라면서 깨기도 했다. 이것이 좋은 감정일까? 은빈은 혼란스러웠다. 학교에서 배운 성교육 만으로는, 친구들에게 들은 어설픈 첫 경험의 이야기 만으로는, 알 수가 없는 감각들이었다.
지우 선배는 사회학과였다. 인문 강의동에서 주로 문학 관련 수업과 교양 과목들을 듣고 있을 때면, 고등학교 때 동경했던 선배들처럼 멀리서 봐도 빛이 나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초록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백팩을 메고 걸어오는 모습만 봐도 은빈은 마음이 설레었다. 강의동 1층에 있는 커피 자판기 앞에서 마냥 그 사람을 마주치길 기다렸다가, 지우 선배가 다른 동기들과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사회학과 전공 수업 신청까지 했다가, 수업을 못 따라가서 고생했던 적도 있었다. 지우 선배는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며 턱을 괴고, 한 손으로 노트에 무엇인가를 끄적거릴 때가 제일 멋있었다. 그 사람이 쓰는 글 들 속에 은빈 자신이 주인공이 된다면 좋을 텐데, 했던 적도 있었다. 어느 비 오는 날의 사회학과 수업에서, 그녀는 자신이 잘 알지 못했던 민주화 관련 근 현대사에 관한 강의를 듣고 약간은 충격에 빠졌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다행히 강의실 뒤편에 앉아서, 다음 시간이 공강인 것을 확인하고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지 했던 게 그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날따라 하얀 원피스를 입고 웨지 힐 샌들을 신었었는데, 비가 와서 돌아가는 길이 미끄러울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강의실이 조금은 추웠다. 이윽고 따뜻한 느낌이 몰려와서 살짝 눈을 떴다. 어깨 위에 초록색의 보풀이 살짝 인 약간은 두꺼운, 지우의 남방이 둘러져 있었다. 은빈은 본능적으로 후욱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냄새가 포근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은빈은 곱게 그 옷을 접어 가방에 넣고 아주 조심조심 걸어서 복도를 나왔다. 비를 맞고 학교 근처 자취방에 돌아가는 길에 몸은 젖어드는데도 마음만은 상쾌하고 뽀송거렸다.
지우선 배는 그다음 전공 수업 시간에 오지 않았다. 시월의 어느 날 즈음이었던가, 싶다. 그 수업에서 낙제를 할 정도로 결석을 하고 난 이듬해의 같은 전공 수업에서, 은빈은 지우에게 그 남방을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곱게 접어서 쇼핑백에 넣어 편지랑 손수건을 선물로 넣어서, 은빈은 떨리는 손으로 지우에게 그것을 건넸다.
‘저, 이거요. 감사했어요.’
‘아 응. 그래.’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의 서늘한 눈매가 은빈을 쑤욱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은빈은 그 느낌이 뭔지 잘 몰랐다. 그때 그녀의 촉이 조금은 경계심을 세웠더라면, 후의 몇 년 동안 그녀의 삶은 또래에 어울리게, 좀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싶다. 은빈은 좀 더 많은 경험들을 하고 싶었었다. 천성이 유쾌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여행도 좋아했던 그녀이기에, 그림을 좋아했던 그녀이기에, 유럽 여행도 가고 싶었고, 좋아하는 그림에 대한 공부도 더 하고 싶었다. 지우는 머지않아서 은빈에게 접근해 왔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그는 은빈의 자취방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그가 그녀의 몸에 처음 들어오려고 할 때, 은빈은 어릴 때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지우는 어릴 때 은빈이 반항할 수 없었던 무서운 완력의 사람이 아니다. 지우는 그녀가 동경한 사람들 가운데서 육체를 받아들인 최초의 사람이었다. 뒤에서 은빈을 안는 지우의 몸짓은 거침이 없었다. 은빈은 아팠다. 그날의 느낌처럼, 아프고 쓰라렸다. 하지만 그게 사랑을 받는 몸짓이라고 생각하니 참을만했다. 허리가 꺾이는 아픔이 꽤 오래갔지만 지우가 안아주면 그래도 견딜만했다. 처음 관계를 가지고 침대 시트에 피가 묻어 나왔을 때, 지우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혹시, 처음이었어..?’
하지만 은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녀가 받아온 무언의 교육 속에서는, 아랫도리가 더럽혀진 여인은 대체로 불행했기 때문이다. 늘 최초의 경험은 아름다워야 하고, 맺어져야 하고, 행복한 엔딩으로 끝나야 했기 때문이다. 은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하지만 지우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런 관계를 꽤 오래 이어갔다. 지우는 먼저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다. 은빈은 그가 미래를 함께 하자는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은빈은 지우만 있다면, 딱히 자신이 생각했던 미래의 그림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었다. 지우는 내게 좋은 울타리가 되어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은빈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지우는, 강의 수강이나 졸업 후 진로에 대해서, 경제관념에 대해서, 여성의 인권에 대해서, 나름의 시각으로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은빈은 딱 한 번, 멀리 사는 엄마에게 지우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남자를 너무 집에 자주 들이지 마’
라고 엄마는 말했다. 생각해 보면 대학에 온 다음부터 엄마의 얼굴을 본 게 손에 꼽는다.
‘지우 선배, 저 졸업하기 전에 선배 부모님을 만나보고 싶어요.’
‘왜 갑자기? 우리 부모님은 좀 바쁘셔. 나중에.’
은빈은 지우가 자란 가족이 그녀와는 다르게 꽉 채워져 있는, 평범한, 그런 가정이기를 희망했다. 그에게는 여동생도 있었고, 그렇다고 하면 은빈과 엄마 둘이 자란 집이 아닌, 가장 안정적인 네모가 만들어지는, 그런 가족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정상이라고 해서, 그 가정사가 평탄할 것이라고 생각한 건 은빈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우물 안 개구리처럼,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아가 그녀의 그 후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영향을 받을지도 알지 못했다.
**2008년 2월 28일의 일기
이 밤에 글이 쓰고 싶은 건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내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검은 심연으로부터 뭉게뭉게 피어오른다는 이야기니까. 아주 잘, 곱게 내리눌러 있었던, 아니 막걸리 찌꺼기 마냥 가라앉아 있던 미미한 소량의 분노와 울분이 치밀어 올라 모처럼 맑았던 내 마음을 흐리는 밤. 그런 밤이다.
지우 선배가 떠난 것 같다. 내 졸업식과 자취방 계약 만료에 거의 맞물려 일어난 일이다. 처음에는 졸업식에 오지 않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가, 전화번호가 바뀌었다는 음성 메시지에 가슴이 철렁해서, 서둘러 집에 가보았다. 자신의 짐은 싹 챙겨서 처음부터 없던 사람처럼 떠났더라. 그 사람의 동네에 찾아가 보았다.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그의 부모님이 살고 계시다던 이층 집에.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우 선배에 관한 건 작은 것도 놓치지 않았던 나였기에 그가 지나가듯 말한 동네 언저리를 기억할 수가 있었다.
아빠, 라면서 세 살쯤 된 것 같은 남자 애가 지우 선배의 목을 감쌌다. 옆에 손목 보호대를 한 중년의 여인이 서 있었다. 눈매가 매서운 게 선배를 약간 닮았다. 내가 생각한 자애로운 엄마의 모습은 아니었다. 대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호통을 치는 사람이 있다. 빨리 들어와 밥 하라고 소리치는 모습은 내가 기대한 아빠의 모습도 아니었다. 지우 선배의 분위기가 꽤 고고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는 집 모양은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약간 멍했다. 아빠? 지우선 배가 아빠? 나는 여태까지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럼, 지우 선배는 가정이 있었던 거였어?
어쩌면 나는 오늘 내가 사랑했던 거라고 믿은 한 사람을 영원히 떠나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잣대를 들이대 봤을 때 그는 내게 도움 될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랑이 아주 많이 두려웠던 나는 그를 무턱대고 좋아했던 내 마음을 없었던 셈 치고 놓아버렸다. 공기 속에 떠다니는 의미 없는 말들과, 나랑은 상관없었을 무언가의 이유로 어제의 식사 자리를 일찍 박차고 일어난 그의 뒷모습을 나는 외면하기로 했다. 비가 내려 시원해진 동네 어귀를 돌며 애써 ‘우리의 무언의 관계’가 부서진 순간의 알아차림을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불씨조차, 남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모든 아귀가 맞는다. 그가 사라졌던 시간들, 그와 같이 다니던 서율 선배가 학교에서 사라진 일, 엄마가 했던 말, 남자들의 손짓과 몸짓. 거짓말. 참을 수 없이 욕지기가 올라왔다.
한참을 게워냈다. 생각이라는 걸 해 보자. 생각을.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게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이야기해 줄 사람은 있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