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향성
한바탕 비가 내렸다. 하늘이 크게 노한듯 천둥 번개가 쳤다. 흡사 죄지은 이가 있다면 본인이 그걸 맞을까 두려울 만큼 가공할 폭우였다. 그 와중에 가야 할 길을 잃고 헤매는 배 위에 앉아있는데, 정신 좀 차리고 노를 저어 살 길을 나아가라는 듯이,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은빈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듯 깨달았다. 그녀 자신이 허울 좋은 누군가의 '대용품'이었음을.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의 어투나 시선이 또래 학생들보다는 훨씬 다부졌음을, 그게 나름 어떤 '경험'에서 촉발되거나 축적된 것임을, 자신은 그저 그런 사람에게 홀딱 반해버린 철부지 처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에서 올라오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그 자체와 그것의 밝은 미래를 믿었다. 사랑을 하고 있었다고 믿었는데, 그는 아니었나 보다. 생전 처음 누군가와 깊게 소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말도 없이 떠난 거였다. 사람 관계에서나 맹했지, 두뇌는 명민한 그녀는 이렇게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 받기 전에 떠나기, 마음 다치기 전에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 두기, 내 이야기를 남에게 바보처럼 하지 말기… 그렇게 은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시원에서 두어 달 지내면서 열심히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행이었는지 전공과는 다소 무관한, 비서직으로 취직되었다. 외국계였고, 불어를 조금 할 줄 아는 게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제일 안심되었던 건, 모셔야 할 상무님이 여자분이었다는 거다. 그녀는 고압적인 남자 상사들을 보면 조금씩 주눅 들었다. 동료 여자 비서들과 있으면 조잘거리며 또래처럼 떠들다가도, 남자 상사들을 보면 불편했다. 동료 남자들이 회식을 하다가 어쩌다 추파를 던져도, 은빈은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잘 몰랐다고 해야 할 듯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성을 믿는다는 전제가 성립되지 않았다. 꽤 가까워진 사람도, 침대를 나눠 쓴 이도 있었고, 같이 보내는 밤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상대가 은빈의 인생에 개입하려고 하면 그녀는 애써 그를 밀쳐냈다. 무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육체와 정신은 같이 가는 거라는데, 그녀는 애써 육신이 허락한 범위의 마음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회사에서 5년 정도 버티자, 질투하고 시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녀 뒤에서 험담을 해댔다. 여자들은 그녀가 남자를 홀리는 여우라고 싫어했고, 남자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여자라고 수군댔다. 개중에는 그녀와 자고 싶어 하는 사람도,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일 마지막까지 그녀가 그 회사에서 만나던 사람은, 그녀가 모시던 상무님의 바로 위, 전무였다는 게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였다. 딱 그 전무의 사모가 오피스 와이프의 존재를 눈치챌 무렵, 전무는 추천서를 써주며 은빈을 전출시키려 했다. 연봉은 조금 더 높은 자리였기에 그녀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의 와이프가 회사에 찾아와서 난리를 치던 그날도, 몇 가지 정도의 일을 마무리하고 나름 부산했던 하루를 떠나보냈던 은빈이었다. 전무는 그래도 끔찍하게 자기 가족을 챙기는 사람이었다. 가끔 은빈은 그런 그의 모습이 낯설고 짜증이 났다. 나이만 보자면 젊디 젊은 자기 자신과 일주일에 한 번은 몸을 섞으면서도, 자기 딸내미의 취직 문제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은빈은 참 싫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 자신도 그에게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얻어냈으니 나쁠 건 없는 기브 앤 테이크였다. 머리끄덩이 좀 잡히고 곧 자발적으로 걸어나올 그 회사의 동료들에게, 다시는 얼굴 못 들만큼 호된 꼴을 당하고 집에 왔다.
그날 밤 은빈은 꿈을 꾸었다. 시간이 없었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일단은 목마른 사람처럼 무엇인가를 노트에 써야만 했다. 그녀의 기억들을. 그녀의 기록들을. 언젠가 배가 살살 아플 때 엄마가 배를 문질러 주던 기억을.
-엄마 손은 약손.
그날 이후로 별일 아닌 것들에도 소름 끼치게 눈물 지어야 했던 그녀의 젊은 나날들을. 가끔 찾아가는 할머니 집이 좋았던 이유는 할머니가 그녀를 씻겨주는 기분이 들어서 그게 좋았다. 그녀가 다시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깨끗한 사람이 되는 거 같아서, 사랑받는 것만 같아서. 때로는 순간의 기억들이 그녀를 관통했다. 식은땀이 한 참 흐르고 이내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눈물이었음을 알았다. 꿈에서 깨고 그녀는 뇌까렸다.
-젠장할.
그렇게 은빈의, 서른 즈음의 가을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대학 동아리의 동창회가 있었다. 만날 사람도 만나고 싶었던 사람도 없었던 주말, 은빈은 다시 준철과 조우했다. 은빈은 알고 있었다. 그즈음 그녀가 느끼던 모든 것들이 그녀의 엄마를 원망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말이라도 한 번 해볼 수 있었으면 했다는 걸. 꽤 오랫동안 끔찍한 일을 당하고 나서 그 이야기들을 누군가와 상의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게 엄마였다면. 그게 내 탓이 아니라고 엄마가 한 마디만 해 주었던 들. 그냥 지나가다가 맞은 돌덩이가 아니라 그녀에게는 온 세상이 뒤집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는 걸. 그래서 은빈은 때때로 남자들이랑 그 짓을 하다가 아랫도리에 번개가 치는 감각을 느낄 때마다, 일말의 죄책감이 들었다. 이 행위는 그녀가 원해서 하는 것인가? 그녀가 이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녀에게는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보다, 그녀의 작고 소중한 몸을 착복했던 파렴치한 영혼들이 더 크게 존재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그것을 사회적으로 이용해 나간다는 게, 혹은 심심풀이처럼 즐기고 있다는 게, 그녀에게 그런 기억들을 씻어줄 수도 있을 거라고 한 때 은빈은 믿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대학 친구들, 동아리 사람들, 하다못해 동호회 사람들, 직장 동료들이 하나 둘 수줍은 얼굴로 설레어하며 청첩장을 내밀 때, 그녀는 숨이 막혔다.
-나만 전혀 다른 세상에 있나 봐. 나만 거꾸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나 봐..
기실 그녀는, 부럽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다. 인생을 함께 갈 만한, 힘들 때는 같이 기댈만한,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그 아무개가.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잘났고, 머리가 비상하고 일을 잘하든, 눈치가 기막히게 빠르든 간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결혼이라는 걸 한다는 행위 자체가, 그녀에게는 약간은 자신의 인생에 자살골을 넣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타인의 몫의 것이었으므로, 그녀 또한 거기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철은 따뜻한 남자였다. 사람을 믿지 않는 은빈에게도 그렇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세심하게 그녀를 살폈고, 안았으며, 어느 날엔가는 그가 그녀를 만질 때 무심코 울음이 터져 나온 적도 있었다. 나는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소중하게 나를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생각에 은빈은 감격하고 전율했지만, 그가 오르가슴이란 걸 느끼게 해 줄 때마다 무너지려는 마음의 둑을 다잡으며 그와 애써 거리를 두고는 했다. 준철은 일보 전진하면 이보 후퇴해야 하는 이 관계가 의아했다. 은빈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묻는다면 그건 정말 잘 모르겠어서였다. 잠자리에서 보는 그녀와, 일상에서 대화하고 만나는 그녀는 좀 달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는 한없이 열정을 뿜어내다가도, 옷을 입고 대화하면 마음에 갑옷을 입은 양 전혀 다른 입장의 관계가 되고는 했다.
처음에는 쉽사리 마음을 주지 않으려는 그녀에게 도전감도 느꼈고, 은근히 세심한 여자라는 걸 알자 기대도 했고, 그녀를 안고 있으면 따뜻한 바닷속에서 유영하는 것 같아 좋았다. 혼자서 꽤 오래 살았던 탓인지 그녀는 살림을 잘 챙기는 편이었고, 일도 곧잘 하는 것 같았고, 집에서 소일거리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삶에 만족하는 듯 보이다가도, 가끔씩 멍하니 먼 곳을 보는 눈동자를 볼 때마다 까닭 모를 괴리감을 느꼈던 준철이었다. 그렇게 오늘 밤이 왔다. 부서진 가족의 단면을 보는,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이 밤에, 준철은 다시 은빈을 떠올렸다.
-왜, 준철아, 나 그냥 집에 있어.
-약속 없으면 지금 나 있는 데로 올래요? 선배 집에서 멀지 않아요. 나는 혼자 소주 한 잔 하고 있어요.
엄밀히 말하면 준철의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슬비까지 내리는 토요일 밤에 은빈이 진짜 장례식장까지 찾아올 줄은 솔직히 말해, 몰랐다. 장례식장이라고 말했는데, 은빈은 굳이 예의 그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찾아왔다. 그녀의 짧은 단발과 긴 목은 그 옷에서 도드라졌다. 그래서 조문객들 사이에 앉은 그녀의 모습은 지우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지우는 조문객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흰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의아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얼굴이 눈에 익자, 예의 없고 이상한 행동을 할 리는 없는 은빈이 어떻게 이곳에 왔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잠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녀 앞에 앉은 사람도 사실은, 누구인지 잘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외롭다.
처연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그녀가 원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준철과 이런 우중충한 장례식장에서 토요일 밤에 소주를 한 잔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 한마디일 뿐이었다. 준철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은빈도 언젠가는 영아원에서 봉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대학교 과제 때문이었는데 하다 보니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동시에 그런 미소를 지닌 아이들을 – 물론 울 때는 볼기짝을 찰싹 때리고 싶을 만큼 밉기도 했지만 – 버린 이름 모를 여자들이 싸잡아 밉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누군가의 인생이라면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엄마의 인생도 마찬가지였다.
격자 모양 창문틀이 있던 그 집에서 나와 몇 년이던가. 엄마는 지금은 또 어떤 남자와 살을 섞으며 살고 있을까. 그 사람은 내 몇 번째 아버지일까. 왜 항상 결말은 비슷할까. 어찌 보면 엄마에게 다른 자녀가 없는 게 차라리, 무척, 안심이 되었다.
그런 생각들을 할 무렵, 저 멀리서 상주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심코 은빈은 자신이 하얀 옷을 입고 있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상가에 와서 앉아있다는 생각에 조금 무안해졌다. 시야에 잡히는 그의 얼굴이 좀 더 또렷해지자, 그녀의 눈동자는 좀 더 커졌다. 그리고 준철을 다시 쳐다보며 생각했다.
-준철이 여길.. 어떻게?!
고인의 영정 사진을 보자 얼추 아귀가 맞춰졌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난다. 은빈의 눈에 까닭 모를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그 옆으로, 파리한 얼굴의 남자아이가 한 명 보였다. 열다섯은 된 거 같은데, 몸이 참 말랐다. 핏기도 없었다. 은빈은 학생 시절의 한 순간을 문득 그 얼굴에 겹쳐 떠올렸다.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준철이 옆에 있었으므로, 고개를 들고 숨지 않으려고 해 보았다.
-지우 선배.
공허한 외침이었다. 공기 중으로 말이 흩어져 차갑게 지우의 살갗에 부딪혔다. 지우는 표정에 큰 변화가 없이 물끄러미 은빈을 바라보았다.